황금의 도시 the City of London

(the Golden City - the City of London)

1. 파운드로 가는 시간 여행

영국으로 떠나는 선배에게 격려금이라며 후배가 바꾸어다 준 50파운드짜리 지폐를 보는 순간, 지갑을 더 큰 것으로 바꾸어야겠다는 생각부터 한 것은 화폐의 가치"저장" 기능에 더 큰 중요성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
그러나, 지갑 속의 돈을 헤아리기보다는(혹은 지갑 속에 어떻게 돈을 "저장"할 것인가보다는) 하늘의 별을 헤아리기를 더 즐기는 이들에게 영국 돈, 그러니까 영국 화폐는 화폐론에서 이야기하는 지불수단이라던가 교환의 매개수단적 기능 외에도 그 돈을 둘러싸고 벌어진 숱한 역사적 사건에 대한 탐구심을 불러일으키는 묘한 기능을 갖고 있다. 동전의 갖가지 모양이야 다른 나라에서도 볼 수 있는 평이한 모양이라고 할 수 있지만, 각 단위의 지폐에 들어있는 그림과 설명들은 마치 화보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어, 다른 나라의 지폐에서는 좀처럼 찾을 수 없는 매력을 갖고 있기때문이다. 더구나 지폐 전면 상단에 자그마하게 인쇄되어 있는 "I PROMISE TO PAY THE BEARER ON DEMAND THE SUM OF ..."라는 문구라도 주의깊게 들여다 본 사람이라면 이 문자적 "약속" 뒤에 있을 법한 숱한 이야기에 대한 호기심때문에 액면의 가치를 망각케 될 지도 모를 일이다.

깨어진 약속

1797년, 2월의 어느날, 런던은 온통 혼란의 도가니에 쌓여있었다. 1793년부터 시작된 나폴레옹과의 전쟁 이후, 계속적으로 공포의 원천이 되어왔던 프랑스 군대가 드디어 영국땅, Fishguard, Pembrokeshire에 상륙한 것이었다. 1400명의 프랑군이야 곧 격퇴되었지만, 혼란은 가중되었고 런던의 상인들은 the Bank of England에서 발행한 5파운드, 10파운드짜리 은행권(당시로서는 꽤 큰 금액이었던)을 금으로 바꾸기 위해 Threadneedle Street에 있는 은행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당시 수상이던 Willam Pitt는 곧 the Bank of England에 5파운드, 10파운드 짜리 은행권에 대해 지불을 중지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한편, 안보에 대한 국민의 불신감을 불식시켜 혼란은 점차 안정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영국 금융사에서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기게 되었는데 이는, 지금도 영국 지폐에 인쇄되어 있는 바로 그 "약속"을 이행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1파운드의 탄생

William Pitt수상의 지불정지 명령으로 인해 당시로서는 꽤 큰 금액이었던 5파운드, 10파운드 은행권이 통용되지 못하게 되자 곧 소액의 액면가를 가진 은행권이 필요하게 되었고 이는 1파운드짜리 은행권의 탄생으로 귀결되었다. 지금 환율로 계산하면 당시의 1파운드가 약 40파운드정도의 가치를 지닌 것이라고 하니 그리 적은 가치도 아니었던 듯 싶다.
당시의 인쇄기술로 찍어낸 이 1파운드짜리 은행권은 단순한 디자인과 인쇄의 조악함으로 쉽게 위조가 가능한 것이었고, 이에 따라 위조는 극형에 해당하는 중범죄로 분류되기 시작했다. 사실상 이 1파운드짜리 은행권의 등장이 가진 문제점은 위조의 우려가 높다는 것보다는 지나치게 많이 발행되어 인플레이션을 유발, 영국 금융계가 지닌 신용을 실추시켰다는 것이다.
1821년까지 쓰였던 이 1파운드짜리 은행권이 자취를 감추게 된 후, 새 1파운드짜리 은행권의 발행이 재개된 것은 1차대전이 발발, 정부가 전쟁자금으로 금이 필요하게 되면서부터였다. 흰종이 한쪽 면에만 검은 잉크로 인쇄된 이 지폐는 the Bank of England에서 발행한 것이 아니라 재무부(The Treasury)에서 발행한 것이었다. 현재와 같은 양면으로 인쇄된 근대적인 지폐, 앞에서 언급했던 그 중요한 약속이 인쇄된 지폐는 1928년 the Bank of England에서 발행되게 된다. 당시 지폐의 색깔은 초록색이었는데 이 색은 다시 1940년 파란색으로 바뀌게 되었고 나찌의 위조를 방지하기 위해 금속 실선이 지폐 속에 내장되게 되었다. 여왕의 초상이 들어간 지금과 같은 지폐는 1960년 처음 발행되었다. 이 지폐는 해롤드 윌슨(Harold Willson) 행정부 시절, 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한 정부의 방침으로 어느날 아침, 돌연 평가절하되는 시련을 겪게 되었고 이 평가절하는 지속적으로 윌슨 행정부와 이후 노동당을 유령처럼 괴롭히는 사건이 되었다. 마지막 1파운드짜리 지폐는 1978년 발행된 것이었다. 1978년 마지막 1파운드짜리 은행권의 발행으로 이 1파운드짜리 은행권은 약 180여년에 걸친 영욕의 역사를 마감하게 되었고 1988년에는 法貨(legal tender)로서의 명예(?)도 잃게 되었다.

法貨와 法禍

화폐론에서 논의되는 화폐는 "그것이 지불됨으로써 채권, 채무관계가 완전히 소멸되는 수단"(따라서 어음과 같이 기한이 되어서 지불이 되어야만 채권채무관계가 소멸되는 것은 화폐로 볼수 없다.)을 의미한다. 우리 나라처럼 한국은행이 화폐발행의 권한을 독점하고 있는 경우에는 화폐의 진위가 문제겠지만 영국의 경우에는 문제가 좀 복잡하다. 그것은 아직도 the Royal Bank of Scotland에서 1파운드짜리 은행권(우리 개념으로 지폐)을 독자적으로 발행하고 있고 이것이 스코틀랜드에서는 널리 유통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1파운드짜리 지폐를 잉글랜드나 웨일즈의 구멍가게에서는 받기를 거절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엄격하게 보았을때 이 지폐는 영국정부가 법적으로 인정한 법화(legal tender)가 아니기 때문이다. 법화가 아닌 1파운드짜리 지폐는 스코틀랜드 은행권만은 아니다. 엄연한 영국땅인 Isle of Man이나 the Channel Islands에서도 아직까지 자신들만의 파운드 지폐를 발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각 지역에서 발행되는 이 파운드 지폐는 그 지역에서는 일반적으로 유통되는 것이므로 아무 문제가 없으나 지역 경계를 넘는 순간 법적 신분 보장을 받기 힘든 결점을 가진 화폐가 된다. 法貨를 사용하지 않을 경우에 法禍를 당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스코틀랜드 돈은 스코틀랜드에서, Isle of Man 돈은 Isle of Man에서 써야 할듯 하다. 돈은 쓸 곳에(!) 써야 할 일이다.

어림반푼어치도 없는 동전

1파운드지폐의 뒤를 이어 나온 1파운드 동전은 현재 South Wales의 Liantrisant의 화폐창(the Royal Mint)에서 주조되고 있다. 생산원가 2.5p, 구리, 니켈, 알루미늄 합금으로 주조되어 40년이 평균 수명인 이 동전은 그리 길지 않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스캔들의 주인공이 되었었다. 1991년 영국 화폐창은 그 기술의 우수성으로 말미암아 남아프리카의 스와질랜드로 동전을 만들어 수출을 하게 되었다. 문제는 이 수출용 동전이 자판기와 같은 기계의 인식장치로는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영국의 1파운드 동전과 거의 같은 디자인과 크기를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영국 화폐가치로 21p정도의 액면가를 가진 이 동전은 스와질랜드보다 런던 시내에서 더욱 인기였고 고액의 주차요금으로 악명을 떨치던 무인 미터기가 이들 스와질랜드 동전들의 집결지가 되기 시작했다. 결국 수출용 동전의 크기와 디자인을 바꾸는 것으로 문제는 해결되었지만 한동안 1파운드짜리 동전이 겪어야 했을 주변의 불신("어림 반푼어치도 없다"는 듯한!) 무척이나 뼈아픈 것이었으리라 생각된다. 파운드를 삐딱한 시각으로 보면 우리나라를 비롯한 다른 나라의 경우, 역사 속의 인물이 주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지폐전면에, 생존해 있는 여왕이 등장하는 것은 왕실의 권위, 여왕의 위치 등을 실지 피부로 경험해 본 사람이면 그리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나 이 영국 지폐를 삐딱하게(!) 본다면 무척 이상한 사실을 하나 발견할 수 있다. 여왕의 초상이 있는 부분으로부터 대각선 방향에 등장하는 인쇄된 서명이 바로 그것. 서명의 주인공은 Chief Cashier라는 타이틀로 등장하는 G.E.A. Kentfield라는 사람. 영국정부와 the Bank of England를 대신해서 I PROMISE ... 라는 약속에 서명한 이 사람은 영국 은행장도, 정부의 관료도 아니다. 그는 1991년부터 the Bank of England의 은행업무를 관장하는 부서인 the Banking Department의 책임자(the Chief of the Banking Department)인 Graham Edward Alfred Kentfield이다. 그는 지금도 가족과 함께 외식을 한 후 지갑에서 자신의 서명이 인쇄되어있는 지폐를 꺼내 계산을 하고 있을 현재의 인물, the Bank of England의 한 부서에서 부하직원의 업무를 관장하며 땀을 흘리고 있는 평범한 직장인일 따름이다. 역사속의 인물도, 최고위직책을 가진 적도 없는, 어쩌면 길에서 마주쳤거나, 같은 식당에서 식사를 했을 지도 모를 이 사람의 서명이 왜 전세계적으로 강세를 떨치고 있는 파운드화의 한면에 여왕의 초상과 함께 나란히 인쇄되어 있는 것일까? 그가 가진 타이틀은 왜 the Chief of the Banking Department가 아니고 Chief Cashier일까? 이 궁금점은 우리를 1694년 Act of Parliament establishing the Bank of England를 시작으로 설립된 영국 중앙은행의 이야기, 그리고 세계무역의 중심이었던 the City of London의 이야기 속으로 이끌게 된다. Sterling으로 통칭되는 Pound화의 역사를 씨실로, "The Old Lady of Threadneedle Street"라는 별명으로 불리우는 the Bank of Englnd의 역사를 날실로 해서 종횡으로 짜여진 the City의 모습은 어떤 것이었을까?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