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주인 맞는 웨스트민스터

숨쉬는 역사의 발자취들

지각으로 議席 잃는 하원의원

웨스트민스터 하원(the House of Commons)의 새주인이 된 의원들은 단지 지각했다는 이유만으로 천신만고 끝에 얻은 자신의 의석을
잃을수도 있다. 이유는 단 하나. 하원(the House of Commons) 회의장의 앉을 자리가 의도적으로 작게 설계 되었기 때문. 총 651명의
의원을 가진 하원의 회의장은 보다 나은 토론 분위기를 위해 총 437명만을 수용할 수 있게 지어졌다. 모든 의원이 참가해야 하는 경우에는 자리다툼에 입석을 각오해야하는 민주주의의 산실, 웨스트민스터. 복제양 Dolley의 등장으로 인간의 복제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는97년의 시각으로 보면 차라리 고생대 화석에나 비유할 수 있을듯한 낡은 제도와 관습을 그대로 유지해 나가는 웨스트민스터. 그 구석구석에 배어져 있는 이야기들은 어느나라보다도 많은 정치적 혼돈의 경험을 가진 우리에게 그 역사만큼이나 풍부한 촌철살인의 지혜, 반면교사의 교훈을 제공해 준다.

의사봉 휘두르는 "존경하는 의원"

여의도 국회를 한번쯤 참관해 본 이들 중에는 기대치 않았던 "설전"을 구경했던 사람이 적지 않다. 대부분 대정부 질의나 야당에 대한
정치적 공격중에 발생하는 이 "설전"은 야심찬 초선의원과 여, 야의 중진의원사이에 벌어지게 마련이다. "某의원은..." 으로 시작된 발언은
"당신이 .." 등등으로 전개되기 십상이고 이어 "뭐야, 너 뭐라 그랬어, 새파란..."등등의 험악한 말이 오가는 상황으로 발전하게 된다. 교육
목적으로 학생 참관단이라도 인솔했던 교사가 있었다면 학생들 보기가 난감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영국 하원은 이러한 상황을 가능한한 억제하기 위한 규칙을 갖고 있다. 누구도 상대방 의원의 이름을 직접 거명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의원들이 연설 중에 특정한 의원을 거명해야 하는 경우에는 반드시 "The(My) Honourable Member(Gentleman or Friend) for ..." 로 시작하여 필요한 경우 그 의원이 대표하는 선거구를 붙여 불러야 한다. 직접 호칭을 불렀을때 사소한 개인 감정이 격화되어 중요한 논쟁을 희석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물론 논쟁이 격화되면 여기 저기서 비난과 지지의 소음이 일지만 의장의 질서를 명하는 발언("Order, Order..")이 있게 되면 모든 의원들은 발언권을 얻기 위해 조용히 일어나야 한다. 천장에 매달려 있는 수십개의 마이크가 일어서서 이야기할 경우에만 잘 들리게 고안되었기 때문이다.
예외없는 법칙이 없듯이 영국의회에도 질서를 문란케한 사건이 여러건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최근의 사건이 이른바 "의사봉 사건"(Mace
incident). 내각 각료들이나 야당의 간부(이른바 Shadow Cabinet)들이 나와서 연설하는 중앙의 단상에는 연설대 대용으로 사용되는 "The
Dispatch Box"(성경과 의원모두의 선서문(oath cards)이 담겨 있다.)와 의장의 권위를 상징하는 의사봉(the Mace: 여의도에 있는
국회의사당의 의사봉을 생각하면 곤란하다. 야구방망이만한 철제봉이기 때문이다)이 놓여져 있다. 그런데 1976년, 노동당 정부하에서 존
메이져 정부의 부수상이었던 마이클 헤즐타인(Michael Heseltine)이 백발을 휘날리며 관우 청룡은월도 휘두르듯 이 의사봉을 들고 휘두르는 전대미문의 사건을 저질렀던 것. 결국 이 사건은 다음날 의회에서 그가 공식사과를 하는 것으로 마무리 지어졌다. 철의 여인으로 불리우던 마가레트 대쳐 수상을 권좌에서 내몰았지만 결국 당권을 장악하는데 실패, 2인자로 머물러야 했던 마이클 헤즐타인은 "칼을 휘두르는 자는 결국 왕관을 쓰지 못한다.(He who wields the knife never wears the crown.)"라고 말했었다. 그러나 당권경쟁때마다 그의 과격한 이미지가 감점요소로 작용하고 있는 것을 고려해보면, 그는 먼훗날 자신의 말 가운데 the knife를 the Mace로 바꾸어야 할 지도 모른다.

"짝짓기 실수" 대 "불가피한 날치기"

유럽에서 가장 완벽한 보안장치를 가진 곳은 어디일까? 그곳은 MI 5보다 더 안전하다는 당 간부(Whip)의 사무실이다. Whip이라는 말의
기원은 18세기부터인데 당의 의사진행일정과 규율, 기강을 담당하는 간부들을 사냥터에서 사냥개들을 불러모으는(whipped-in) 사람에
비유하면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자당 의원의 모든 신상기록을 이른바 the Black Book 또는, the Dirt Book이라고 불리우는 책자에
모아두고 있어 각 의원의 아내보다 그 의원에 대해 더 잘 알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존 메이져수상, 케네쓰 클락 재무 장관(Chancellor of the Exchequer), 마이클 포틸로 국방 장관, 이들 모두가 각료로서의 수업을 다우닝가 12번지의 집권당 당간부 사무실에서 받은 이들이다.
당간부들이 모든 의원들의 일정을 포함한 각종 상세한 정보를 다 가지고 있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하원에서 진행되는 법안 투표(하원에서의 투표는 Division이라고 불리우는데 의장석을 중심으로 회의장 좌우에 각각 the No Lobby와 the Aye Lobby가 있어 그 방에 들어가는 사람들의 수를 세는 것으로 투표를 진행한다.)를 원만하게 진행하기 위해서이다.
의원들의 반란표를 사전에 예방하고 결석을 방지하기 위한 각당 당간부들의 노력은 재미있는, 때로는 위험한 일종의 신사협정을
만들어내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짝짓기"(Paring)이다. 여당의 몇 의원이 피치못할 사정으로 투표시 결석을 하게 ?을때 야당 의원 중
마찬가지 상황에 처한 의원들과 짝을 지어 동시에 투표를 하지 않게 협정을 하는 이 방법은 1983년 이후 잘 시행되지 않았으나 메이져 정부
말기 여당이 노동당과 사민당 양당의 당간부와 각각 접촉, 이중으로 짝을 짓는 속임수를 썼다고 하여 여당의 도덕성에 대한 큰 논란이
일기도 하였다. 새벽에 야당 모르게 의사당 구석방에서 조용히 노동법을 통과시킨 우리 정부는 이른바 "날치기"를 "불가피한 조치"로
설명하였고 두 야당과 동시에 짝을 지었던 영국 보수당정부는 이를 "실수"였다고 주장하였다. 우리 국민은 "순리에 따른 조치"를,
영국국민은 "실수 없는 정부"를 기대하였음에도 말이다.

부담스런 전통, 갖고 싶은 부담

영국의 고등학교 과정에 해당하는 A-LEVEL과정의 정치학 과목은 주로 영국의 의원내각제와 미국의 대통령제의 전통, 내용, 그리고
양자의 차이점에 중점을 두어 교과내용을 구성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교육목표는 젊은 세대들에게 어떤 정부가 효율적인
정부인가보다는 각각의 정부가 어떻게 운영되어야만 가장 정의롭고 효율적인 정부가 될 것인가를 가르치는 것이라고 한다.
평등과 효율이라는 영원한 반정립 가운데서, 때로는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까지 받고있는 자신들의 의회민주주의의 전통을 어떻게
발전시켜나갈것인가는 과제는 다음세기를 준비하는 젊은이들에게 부담스런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과반세기의 의회주의제도의
역사속에서, 여전히 자신들의 잘못을 제도의 탓으로 돌리는 정치환경을 가진 우리로서는 전통을 가져 부담스런 그들의 고민이 부러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