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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5. 사랑의 관계는 일정한 단계들을 거친다. [페터 라우스터] 「사랑은 아주 대담하게 하면서도 동시에 간격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간격이란 말로 내가 뜻하는 것은 공간적 거리만이 아니라 타인에게 품위를 부여하는 간격이다. 아무튼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사랑은 이런 영웅적인 간격 속에 있다. - 그것은 한 인간이 타인에 대한 일종의 존경이나 숭배이기도 하며 동시에 엄격함이기도 하다.」: 페터 한트케 사랑은 앞에서 다양한 측면에서 상세히 그려졌으며, 사랑을 일어나게 하거나 억압하는 조건들도 함께 기술되었다. 사랑은 우리의 감성이 완전히 열려 있을 때, 상처 입을 수 있을 때 일어난다. 타인을 내 안에서 받아들이고 그의 영혼이 내 안으로 밀고 들어와 앉을 공간이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한 그루 나무나 동물에 대한 사랑은 위험 부담이 적기 때문에 한결 단순하다. 나무나 동물은 한 인간이 그렇게 할 수 있듯이 나를 상처 입히지 않는다. 한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를 완전히 자기 안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가 우리의 열림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지 고려하지 않은 채로 그에게 열중해야 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사랑하겠다면서, 그러니까 타인을 향하여 자신을 완전히 열었다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상처받은 것으로부터 보호되기를 바랄 수는 없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 가지 다, 즉 보호받을 수 있는 안전과 사랑을 둘 다 원한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다. 내가 사랑하고 싶다면 안전에 관한 생각은 포기할 용의가 있어야한다. 상처 입기 쉬운 내 자신의 보호보다 사랑이 더욱 소중히 여겨져야 한다. 타인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해야 한다. 우리가 진실로 사랑할 때, 거기에 상처 입기 쉬운 나의 안전이나 보호를 위한 보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물론 내가 가진 한 인간상, 여성상 혹은 남성상을 바로잡을 수 있다. 여자란 혹은 남자란 이렇다고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니까 그는 이렇고, 이렇게 하면 '분명히 붙들' 수 있으리라고, 그러면 나는 그것을 위한 하나의 테크닉이나 전술을 계발한다. 어떻게 상대방으로 하여금 사랑에 빠지게 만들지, 나 자신이 손해를 보거나 정말로 마음을 활짝 열지 않은 채로 말이다. 어떤 인간이나 어떤 기술로 내가 상처 입게 되는 위험으로부터 지켜달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사랑이 전개될 수 있을까? 상대방은 보호 받음 없이 있으라고 권하고 나 자신은 감정 조절이라는 보호 공간 속에 머물러 있을 수 있는가, 도대체 그게 가능한가.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하려 한다. 자신은 안전 속으로 물러선 상태에서 간격을 둔 채로 상대방의 사랑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자기 자신의 사랑은 아니다. 타인의 사랑이 그런 사람들을 바깥으로부터 따뜻하게 해주어야 하겠지만 그들 자신은 사랑의 불꽃을 체험하지는 못한다. 타인에 대한 불안은 무엇보다 그로부터 사랑받지 못하리라는, 나 자신의 개성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리라는 불안이다.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것은 커다란 모욕이다. 그것은 크게 상처 입은 일이다. 우리의 영혼이 이 분야에서 이미 많은 상처딱지와 흉터를, 가지고 있을 때는 그 상처가 그만큼 더 크고 아프다. 타인에 대한 불안이나 타인의 거절에 대한 불안은 이런 종류의 체험이 처리되지 않고 영혼 속에 잠재해 있을 때 일종의 신경증적인 불안이 된다. 유년기의 대부분의 체험들은 우리의 내부에서 처리되지 않고 있다. 그 때는 아무도 우리를 도와 주지 못했던 것이다. 그걸 다 느껴서 떨쳐버리고, 그것에 대해 명상하고, 그것에서 오히려 성장하고, 보다 강하고 보다 건강하게 되라고 말이다. 그러면 우리는 스스로 이런 불안들을 극복할 수 있을까? 자신을 열고 상처 입기 쉬운 사랑의 모험으로 들어가는 것이 가능한가? 가능하다. 다만 그것이 진정한 사랑의 행복을 경험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 명확해져야 한다. 우리는 날마다 새롭게 상처 입기 쉬움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어야 한다. 상처 입을 수 있음 속에 생명이 있다. 안전이나 상처 입을 수 없음 속에는 죽음이 있을 뿐이다. 죽으면 우리는 더 이상 상처 입지 않는다. 그 때면 모든 불안과 상처 입힘도 끝난다. 그렇다면 우리가 죽기만 바라야 하는가? 보호와 안전을 찾아 애쓰는 사람은 그만큼 더 죽음을 향해 가까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생명이란 애초에 무방비이며 언제든지 상처 입을 수 있는 위험 앞에 노출되어 있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지나치게 상처 입지 않는 삶을, 안정된 삶을 추구하고 있다. 그러나 그건 안 된다. 불꽃에 데일 위험은 원하지 않으면서 우리를 따뜻하게 해주는 불만 찾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사랑은 영혼의 생명력의 최고의 형식이다. 우리가 사랑하면 우리의 전인격, 인지, 모든 감정과 감각의 체험들이 보다 생명력을 지니고 발랄하게 움직이게 된다. 안정과 보호를 추구하면 우리는 무디고, 긴장되고, 경련적으로 된다. 날마다 생명력이 줄어 가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죽음이 우리에게 성큼 다가온다는 무서운 사실을, 엄청난 위기 의식을 온몸으로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첫 번째 단계 : 주목 사랑이란 본질적으로 무슨 단계들을 거쳐서 진행되는
현상이 아니다. 우리는 사랑하든지 아니면 사랑하지 않는다. 그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다. 만일 우리에게 사랑이 있다면 그보다 더 높은 단계의
상승이란 없다. 단계들이란 다만 우리가 사랑하는 인간에 대한 관계
내에 있을 뿐이다. 사랑은 관계의 과정들과는 구분되어 있다. 그 이후에
일어나는 것은 사랑에 대한 불안과 보호 필요에서, 혹은 사랑이 소멸한다는데
대한 불안에서 일어난다. 사랑은 우선 대상을 주목하게 된다. 지극히 다양한 이유에서.
예를 들면 그 사람이 우리가 받아들이는 미의 이상에 합치되기 때문에,
혹은 어머니나 아버지와 닮아서, 혹은 긍정적인 체험을 함께 했던 어떤
사람과 닮았다는 이유로, 우리는 마음에 드는 한 인간을 보게 된다.
우리는 우선 감각의 자극을 통하여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그것이 시각적인
현시일 수도 있고 목소리의 자극일 수도 있으며 한 가닥의 냄새 혹은
촉각 체험일 수도 있다. 감각은 세계가 우리에게로 뚫고 들어오는 문이다.
감각의 문이 열려 있을수록 우리는 그만큼 더 살아있는 것이다. 모든
사랑의 원천은 감성이다. 상대방이 갑자기 자신의 인물을 의식하게 된다. 예컨대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긴다든지, 그의 몸에서 가벼운 움직임이 일어난다든지, 어쩌면 좀더 꼿꼿하게 앉음새를 고친다든지, 경련이 일어난다든지 아니면 불안해 한다. 그러나 이런 식의 주목은 아직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좀 나중에야 발전된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주목이 사랑의 전제라는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우선 주목이 있어야 한다. 그 주목을 통해서 타인을 나의 실존 속에서 인지해야 하는 것이다. 연애 소설에서는 두 사람의 첫 만남이 가장 흥미진진한 순간이다. 소설에서는 대개 고조된 어조로 이렇게 진행될 것이다. 「그는 그녀를 보았을 때, 벼락이라도 맞은 듯. 그 자리에 섰다.」 「그녀는 그가 앉아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 알았다. 저 사람이야말로 내가 한평생 찾던 바로 그 남자라는 것을.」 「그는 그녀를 처음 보았다. 그러나 그는 그녀와 금방 친숙해졌고, 전혀 낯설음이 없었다. 지금까지 그녀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는데도 말이다.」 소설 속의 사랑은 이런 식으로 빨리 성립된다. 그러나 실제 하나의 관계는 서서히 발전된다. 사랑이 있으면 우리는 인간과의 어떤 관계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한다. 반면 한 그루 나무에 대한 사랑은 한결 단순하다. 그것에 대한 나의 사랑만 존재하면 그것으로 족하다. 인간에게서는 그것이 훨씬 더 어렵다. 상대로부터 사랑을 받기 위해 그의 주목을 끌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한 그루 나무에 대한 경우, 그것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주의를 기울여 바라보며 그 존재를 감각적으로 인지하는 것으로 족하다. 나는 나무에게 나를 주목하는지 묻지 않는다. 그것으로부터 어떤 반향을 기대하지 않는다. 한 그루 나무와 더불어 나는 그것으로부터 혹은 나로부터 무엇인가를 요구하는 관계로 들어서지 않는다. 나는 나무를 있는 그대로 그냥 둘 수 있으며, 나 역시 있는 그대로 나무에게 받아들여지기를 기대한다. 그 차체로 족하다. 바로 그 속에 큰 평화와 아름다움이 있다. 그러나 사람에 대한 사랑은 한결 문제가 있다. 내가 그 사람을 감각적으로 인지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와 일정한 관계를 맺고 의사 소통을 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욕망을 버리면 어떨까? 주의 깊게 고요히 바라보고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것으로 족할 수는 없을까? 어떤 반향을 기대하지 않고 관계를 맺을 수는 없는 걸까? 만약 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걸로 족할 수도 있으리라. 성은 충족 이후에도 번번이 새롭게 형성되는 충동이며,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생리적 사건이다. 나무에게 있어서는 사랑이 성으로부터 자유롭지만 이성의 인간과는 필연적으로 성적 욕구와 연결된다. 이 욕망은 매우 쉽게 맹렬한 탐욕이 된다. 그러나 거기에는 사랑이 아니라 성 때문에 한 인간과 관계를 맺는 위험이 있다. 그러면 나는 매우 빨리 혼란에 빠져 더 이상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그것이 사랑인지, 다만 성인지, 아니면 두 가지가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인지 얼른 분별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 주목의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한다. 성적 자극이 전체로서의 인물의 인지와 뒤섞이고 무엇이 사랑의 영역에 속하는지 무엇이 성의 영역에 있는 건지 구별하기가 어려워진다. 아무튼 시각적인 성의 자극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신체적으로 성의 성숙이 시작되면서 시각적, 청각적 성징(性徵)이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페티시즘적으로 작용하는 개인적 선호들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아스팔트 위에서 나는 하이힐의 굽소리에 주목하기도 하는데,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런 소리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다. 어떤 여성은 남성의 깊은 목소리를 들으면 귀를 세우고, 어떤 여성은 가벼운 광택이 나는 감색 정장 양복에 주의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특정한 향수 냄새를 맡으면 주의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전혀 아무렇지 않다. 반면 한 여성이 검은 옷을 입고 검고 긴 머리를 하고 있으면 주목하기도 한다. 잠재된 성적 본능을 자극한다는 것이다. 주목은 우선은 감각을 통해 일깨워진다. 거기서 일깨우는 자극은 누구에게나 그때 그때 개인적인 경험들에 따라 다양할 수 있다. 누군가의 관심을 끌기 위해 아주 특별한 감각적 자극을 필요로 하는 경우, 그럴 때 우리는 페티시라는 말을 한다. 남성의 아주 유명한 페티시는 하이힐이다. 여성에게서는 그것이 승마용 긴 장화이거나 빨간 운동화, 파이프 담배, 반지 등등일 수 있다. 원칙적으로는 이성과 연관된 의류 혹은 무슨 물건이든지 페티시가 될 수 있다. 페티시 형성의 병적 상태나 도착(倒錯)은 다루지 않겠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주목이다. 관심이 생기려면, 다른 인간이 관심의 영역 속으로 들어오려면 가장 먼저 주목을 위한 주의력이 일깨워져야 한다. 페티시가 주의력을 일깨운다 해서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다. 상대의 특정한 시그널을 선호하는 것이 고착화되는 것은 문제지만 그렇지 않는 한에서는 순간적인 페티시는 소중하다는 것이다. 무엇에든 고착된다는 것은 그 자체가 부자유며, 인물을 그 전체로서 인지하는데 방해가 된다. 이성의 성징에 대한 고착화는 하나의 제한이다. 그렇게 각인이 되어버리면 그 뒤에 있는 전체 인성을 경험하고 체험하는 것이 어렵거나 잘 안 된다. 어떤 자극들을 통해서 그것이 일어났건간에 주목이라는 첫 단계 이후에는 환상의 단계가 뒤따른다.
주목의 다음 단계인 환상의 단계가 시작되면, 상대방은 우리의 머리 속에 유령처럼 나타나 돌아다니다 그 안에 둥지를 튼다. 이제 비로소 순간적으로 환상이 사랑으로 옮겨가는 최상의 전제가 마련된 것이다. 많은 대화를 통해 내가 알게 된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사랑이라는 현상을 좀 알게 되는데는 오히려 관심이 저고, 그보다는 어떻게 하면 상대방을 사랑에 빠지게 할지, 어떻게 하면 그 사람과 동경을 일깨울 수 있을지를 알고 싶어한다. 이 문제는 아주 간단하게 대답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사랑하게 만들고 싶어하는 사람은 우선 주의력을 일깨워야 하는데 이를 한 가지 방식으로 한다. 즉 환상을 자극하여 그것이 상대방의 생각 속에 성공적으로 둥지 틀도록 하는 것이다. 상대방의 환상은 돈 환의 최고의 동맹원이다. 나르시스적인 욕구는 어떻게 하면 상대방을 사랑에 빠지게 할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그 사람도 나를 사랑하며 나를 향해 마음을 기울이게 할지를 묻는다. 어째서 남의 사랑이 그토록 중요하단 말인가? 왜 우리는 우리들 자신이 사랑에 빠져 있음을 그토록 아껴 가며, 자기를 조절해 가며 다루는가? 고조된 나르시스적 욕구와 자신의 사랑의 감정에 대한 자기 컨트롤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우리의 착안점은 우리의 관심과 시선이 남의 사랑보다는 바로 우리들 자신의 사랑을 향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심리적 상태는 환상을 비판적으로 관찰하게 한다. 스스로 사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자신의 환상에 대해 자신을 주의시킨다. 왜냐하면 환상이란 존재해야 마땅한 것, 존재할 수도 있는 것에 대한 생각의 나라로 그를 이끌어 가기 때문이다. 환상은 현실로부터 등을 돌린다. 그것은 어떤 개별적 이유에서든간에 현실의 존재와는 일치하지 않는 한 인간을 구성한다. 그 결과는 환상의 나라 속의 사랑이다. 그것은 그 사람의 현실적 존재를 포착하여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것을 어렵게 하는 장애다. 실제로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발전되면 대개 매우 빨리 환멸이 나타난다. 그리움이라는 정서가 환상으로부터 현실로 넘어가는 동기로 작용하기는 하지만, 현실은 나의 환상에 따라 쉽게 방향을 잡아 주지 않는다. 나는 원칙적인 환상 반대론자는 아니다. 나를 환상을 내려깎아 망상으로 보는 냉정한 물질주의지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해다. 환상을 다루기 위해서는 영혼의 성숙이 필요하다. 환상은 하나의 독자적 세계, 하나의 독자적 창조, 하나의 꿈이지 결코 현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늘 의식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환상 속의 사랑을 경시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그 나름으로 정당화될 수 있지만 적어도 현실적인 사랑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환상의 나라는 현실로부터의 도피 장소다. 나는 그 점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그것을 통해 많은 오해와 환멸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현실 속에서, 정말로 일어나고 있는 것 속에서 비로소 성취될 수 있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현실 속에서의 성취가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큰 역할을 하는 환상의 단계는 될 수 있으면 빨리 극복되어야 한다. 특히 행복한 사랑은 환상의 단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진실한
사랑은 현실의 바탕 위에서 주목으로부터 사랑에 빠짐으로써 환상의
단계를 개입시키지 않고 나아가는 사랑이다. 사랑이 환상의 단계 속에서 발전되는 심리적 질병이어서는 안 된다. 건강하게 자기를 활짝 펼치는 일이어야 한다. 사랑은 현실 속에 살고 있는, '지금', '이 곳'에서 체험한 한 순간으로부터 다른 순간으로 이어지는 살아 있음의 한 과정이자 그 표현이어야 한다.
자연에 대한 사랑 속에는 자기 인식과 자기 실현이 함께 들어 있다. 한 송이 꽃에 대한 사랑 속에서 나는 내 자신을 알게 되며 이런 사랑 속에서 내 자신을 실현한다. 한 마리 동물에 대한 사랑에서는 한 송이 꽃에 대한 사랑에서보다 이런 느낌과 자기 인식이 더욱 강하고 분명하다. 한 인간에 대한 관계에서는 그런 느낌이며 자기 인식이 더더욱 명확해진다. 상대방은 그의 분화된 표현 가능성으로써 나에게 일종의 정서적 '피드백(feed back)'을 준다. 나는 혼자 있으면서도 자신을 인식하기도 한다. 혼자 있음은 그러니 만큼 중요하고 쓸모 있는 길이다. 그러나 나는 나를 남 속에서도 인식하고 싶어한다. 상대방은 나에게 다양한 몸짓, 언어, 무언의 표정, 제스처, 성 그리고 또한 말을 통하여 말한다. 나를 어떻게 느끼고 있으며, 나를 어떻게 생각하며 내가 그에게 어떤 의미의 존재인가를 말이다. 무엇보다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할 경우, 이런 투영 속의 자기 인식의 체험은 매혹적이다. 그가 나의 에고, 나의 자기 중심적 자아의 환심을 간절히 사려하기 때문이다. 애정어린 모든 것, 사랑의 몸짓 하나하나, 말 하나하나는, 인정 받으려는, 자기 가치와 의미를 추구하는 나의 나르시스적 욕구에 환심을 사려한다. 비판이나 비난 속에서도 나는 상대방에게 있어서 내가 상당한 인물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비판은 나의 예고에 아첨하지는 않는다. 상대방의 사랑은 언제나 나에게 힘을 주고 내 존재의 의미를 보증해 준다. 상대방의 무관심이나 경멸은 나를 불안하게 한다. 나에게 고독과 고립의 느낌을 준다. 그러나 사랑 속에서는 고립이 극복된다. 그리고 안정감을 느낀다. 다른 인간에 의해 존재 가치를 인정받고 제대로 받아들여졌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이런 사랑의 느낌들이나 비판과 경멸은 누구나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 사랑이 영혼의 힘과 삶의 기쁨을 증진시키고, 비판과 경멸 에너지의 자연스러운 분출을 마비시킨다는 것을 말이다. 상대방의 사랑은 영혼의 안정감을 준다. 긍정적인 자기 인식이 자신을 활짝 펼치는 일을 북돋아 주기 때문이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주는 사랑도 그 사람에 대해 내가 나 자신에게서 알고 있는 것과 똑같은 작용을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힘을 주는 일, 긍정적인 자기 인식이 그를 행복하게 하므로 그가 나의 사랑 가운데서 활짝 꽃 피며, 삶의 기쁨이 커 가는 것을 바라보는 일로 나도 흡족해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의문이 생기게 된다. 사랑에 대한 갈증, 인정과 긍정적 자기 인식에의 욕구 속에서 하나의 문제가 보이지 않겠는가? 사랑에의 갈증은 사랑과 긍정적 자기 인식의 결손이 특히 클 경우, 그것은 어쩌면 병이 아닐까? 이런 형태의 병적인 결손은 우리가 살고 있는 합리적인 능률 사회에서는, 권위주의적 상벌의 교육 제도가 있는 산업국가에서는 매우 빈번히 관찰된다. 칭찬과 사랑으로써 한 인간을 매우 쉽게 '손가락에 휘감을' 수 있다. 긍정적 자기 인식이라는 안정감을 줄 것 같으면 우리는 너무도 빨리 빠져들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긍정적 자기 인식은 그토록 가지기 어려운 것이며, 또 그토록 오래 기다려야 했던 것이다. 칭찬을 받기 위하여 사랑하려는 마음, 긍정적인 투영을
위하여 다른 사람을 긍정적으로 성찰할 마음가짐이 워낙 크다 보니,
무엇이 사랑인지 무엇이 긍정적인 자기 확인을 위한 병적으로 과잉 고조된
욕망인지 갑자기 불분명해져 버린다. 그러나 사랑은 긍정적 자기 인식에의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그렇지만 나르시스적 결손이 워낙 크다면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사랑에의 욕구는 긍정적 자기 인식에의 갈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소박하게 자기 자신을 전개하는 일이다. 칭찬과
인정이 문제 되는 것이 아니라 가까움과 사랑의 체험, 타인의 사랑과
결부된 내 자신의 사랑의 체험이 문제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숙한 사랑은 긍정적인 피드백에 대해 성찰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사랑을 주고자 하며, 받는 것에 대하여 지나치게 뜨거운 갈증을 가지지 않는다. 그렇다. 사랑은 주는 것 속에 활짝 꽃 필 수 있다. 그럴 때 받고자 하는 욕구는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이다. 그것이 긍정적인 자기 확인 경험에서 좌절한 사람들이 어울린 곳에서는 자연스럽지 못하게 억지로 이루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전개의 한 형식으로서의 사랑의 능력이 그다지도 어렵고 드물다. 그리고 자기 인식에의 추구로서의 사랑은 만나기 어렵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나 사회에서 타인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 사랑의 능력이 있는 사람은 사랑의 능력이 있는 파트너가 드물다는 것과 더불어, 그리고 자기 인식에 목마른 사람은 좌절과 더불어 살아나가게 되어 있는 것이다. 네 번째 단계 : 최초의 그리고 유일한 위기 둘이 함께 있는데도 불구하고, 혼자 있을 때의 자기 인식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이 드러나게 되면 위기가 시작된다. 칭찬과 인정을 기대하면서 둘이 있는 것은 나의 삶과 행복을 위한 기초가 아니다. 나르시스적인 확인에의 소망 위에서는 그 어떤 관계도 건강하게 세워지지 않는다. 사랑에게서 그런 것이 기대되면 사랑은 결국 환멸을 주게 된다. 나는 거듭 나 자신으로 되돌려 보내진다. 둘이 있다고 해서 나르시스적인 상처 입음으로부터, 자기 가치감의 침해로부터 구원되지는 않는다. 그런 구원은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그런 것을 기대한다면 나는 사랑에게 너무도 높은 기대를 내세우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것이 날마다 새롭게 기대된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아무도 우리에게 그런 영혼의 실존 문제를 밝혀 준 적이 없기 때문이다. 혼자 있음과 둘이 있음의 기본적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한 우리는 안정을 찾지 못하고 하나의 환멸에서 다른 환멸로 전전한다. 혼자 잘 못 있는 사람에게 둘이 있는 것이 치료가 될 수는 없다. 그런데도 그것을 믿고 열망하거나 희망한다면 둘이 있음의 위기를 결코 파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위기는 둘의 관계 속에 법칙에 맞게 프로그램으로 입력된다. 그 점을 완전히 명확하게 파악해 놓지 못한 한에서 그럴 수밖에 없다. 우리가 서로 만나게 되는 것은 하나하나의 개별 존재로서이다. 사랑이 이 만남을 무언가 특별한 것으로, 무언가 순간 속에서 행복을 주는 것으로 만든다. 그러나 그 이상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위기는 우리가 또 다시 혼자 있음으로 되돌려 보내진다는 인식과 더불어 온다. 아무리 그것을 원한다 하여도 어떤 한 순간을 붙들지는 못한다. 매 순간은 돌덩이가 땅바닥으로 떨어지듯 그렇게 확실하게 지나가 버리고 마는 것이다. 사랑은 감성적으로 체험하는 순간에 생긴다. 사랑은 바로 '지금', '여기'에 우리의 감각을 거쳐서 온다. 그러나 감각은 규제되지 않는다. 나의 감각들에 내가 의식적인 명령을 내릴 수는 없다. 나는 마음의 문을 열고 감성의 힘을 신뢰하며 사랑하든지, 아니면 그 사랑에 대해 폐쇄적이 되어 스스로를 차단하려고 한다. 단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은 오직 그 사람에게만, 그것도 한평생 매여 있어야 한다고 요구받게 될 경우 그렇다. 마음의 문을 열고 사랑하겠다는 기본 태도가 있으면 이런 고착화는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어떤 사회적 규정이 사랑은 한 인간에게 묶여 있어야 한다고, 진정한 사랑은 단 한 번뿐인 사랑을 위한 최종 결단이어야 한다고 한다면, 나는 부자유와 답답함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 때 나는 그렇게 이해된 사랑의 위기를 커다란 영혼의 고통 속에서 겪어 내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들은 그물로 나비 잡듯 사랑을 잡으려 한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그렇게 해서는 사로잡히지도 소유되지도 않는다. 사랑은 신비로운 모습으로 살아 있는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것은 무엇이든 그 생명성을 상실하지 않고는 잡히지 않는다. 그리고 사로잡힌 것은 서서히 죽어 간다. 근원성과 신선함을 상실해 간다. 이마에 죽음의 표지를 달고 있다. 동물원의 동물처럼, 감옥 속의 인간처럼 말이다. 둘이 있음이 이마에다 죽음의 표지를 다는 것이다 ― 눈 속에, 몸짓 속에, 둘이 있으면서 혼자 있음의 자유가 가볍게라도 침해되면 그렇다. 누구나 상대방의 자유를 극단적으로 참아 주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위기는 피할 수 없다. 사랑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점이 아주 명확해져야 한다. 인식의 명확함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우리들이 받아 온 교육의 저항들이다. 우리는 상대방에게 극도의 자유를 허락해야 한다는 인식에 불안감을 느낀다. 상대방이 나와 함께 있다 하여도 궁극적으로는 혼자라는 사실을 존중하고 인정하는 것이 불안한 것이다. 또한 우리들 모두가 궁극적으로 혼자라는 사실을 정면으로 똑바로 보고 스스로 인정하기가 불안한 것이다. 많은 대화를 나누다 보니 나는 이런 불안 심리에 아주 친숙해졌다. 이런 불안을 우리는 뚫고 나가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무궁무진한 사랑의 벌판이 열린다. 성숙한 사랑과 더불어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더 이상 이의가 있을 수 없다. 다섯 번째 단계 : 해소 혹은 심화 사랑은 강요에 의해서 얻어지는 게 아니며, 우리 속에 가두어 놓을 수도 없다. 사랑은 민감한 영혼의 반응이다. 유연한 영혼의 실제로 살아 있으며 모든 살아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한다. 자연의 힘들이, 바람, 비 그리고 시간이 영향을 미치게 되면 죽은 물질조차도 변화에서 대응한다. 영혼의 과정들은 물질보다 훨씬 더 분명하게 변화한다고 생각된다. 감정의 불변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혼은 부단한 움직임이다. 그러므로 영혼은 자연 속에서 가장 민감한 존재 방식을 지닌 정신의 무한한 보고이다. 사랑은 단단히 묶어 둘 수 없다. 사랑은 오고 또 간다. 쌓이고 또 헐린다. 불 붙고 또 꺼진다. 사랑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고, 사랑이 다만 몇 시간, 며칠, 혹은 몇 주일 정도만 지속된다고 하여 탄식할 이유는 없다. 어쩌면 잃어버린 사랑보다는 잃어버린 기회를 두고 더 한탄하는 것은 아닐까? 물질적 이들과 사업, 안전, 영혼의 안정감이라는 기회 말이다. 만약 우리가 다른 영혼의 욕구들과 사랑을 결합시킨다면 우리는 사랑에게 너무 지나치게 높은, 무엇보다 그릇된 요구를 내세우는 것이다. 우리는 늘 어떤 결손을 감지할 때 사랑을 심화시키려 하고 붙잡아 두려 한다. 사랑더러 우리는 재정적 혹은 심리적 안전을 달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것을 사랑은 해줄 수 없다. 사랑을 다른 목적에 잘못 이용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사랑은 심화되는 대신 곧 휘발해 버리고 만다. 그렇게 되면 제아무리 세련된 속임수도 우리를 도울 수 없다. 사랑은 속임수에 의하여 지배되지 않고 소유라는 정신적 새장에 가두어지지도 않는다. 사랑은 가장 두터운 장벽도 뚫고 녹인다. 모든 심리적 안전 장치들도 꿰뚫어 본다. 그 때 사랑은 오성이나 사고보다도 더 지적이다. 사랑은 지적 능력으로 심화되지 않는다. 사랑은 자신의 심리 법칙들을 따른다. 그 법칙들은 다행히도 아무리 세련된 오성의 조종에 의해서도 폐기되지 않는다. 사랑은 워낙 민감하여 오성이 그것을 붙들고 싶어하면 할수록 급하게 미끄러져 나가 버린다. 그런데도 우리는 늘 사랑의 심화를 지향하여 노력한다. 사랑이 고조된다고, 자랄 수 있다고, 커지면 심화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이 고조되고 자라서 커지며 심화될 수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늘 의식적인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감성의 흘러넘침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사랑은 자유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강요받아서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의지가 개입되자마자 사랑은 휘발해버릴 극도의 위험에 처하는 것이다. 사랑의 관계의 다섯 번째 단계는 그렇기 때문에 가장 흥미로운 단계다. 한 관계의 운명이 결정되는 단계인 것이다. 다섯 번째 단계를 위한 성숙은 다만 드물게 계발된다. 왜냐하면 이 단계에서 준비가 없으면 큰 고독에 이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아무도 우리를 도와 주거나 충고를 줄 수 없다. 우리의 사고와 더불어 오성으로 파악되거나 지배되지 않는 한 현상 앞에 서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심화를 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심화를 원하는 바로 그 순간에 이미 사랑의 해소가 불가피하게 나타난다. 우리는 해소를 똑바로 인정하고 싶지 않아 온갖 심리적 방어 기제를 투입한다. 해소라는 진실을 보지 않기 위해서다. 특히 비극적인 것은 이런 심리적 방어 기제를 가지고 한평생을, 죽음에 이르기까지, 이미 해소된 것을 숨기려 하고 심화되었다고 허울을 입히는 애정 관계이다. 독자 여러분은 어쩌면 사랑에 대한 한 권의 책에서 어떻게 사랑의 심화를 위하여 노력하며, 어떻게 해야 사랑의 심화에 도달할 것인지에 대하여 계몽시켜 주기를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독자들의 기대를 따를 수가 없다. 덧붙여 이 문제에 대해서 분명히 해두고 싶은 것이 있다. 한 애정 관계의 심화는 오성을 거쳐서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순간에서 저절로 우러나와야 한다. 한 순간은 다른 순간으로 넘어간다. 아무것도 꼭 붙들어 둘 수 없다. 시간은 흐른다. 매 순간 속에 시간 초월이 지배할 수 있다. 그러나 순간이 지배될 수는 없다. 그것은 그냥 일어나는 것이다. 순간에다 우리를 맡겨야 한다. 순간에 신뢰를 가진 사람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없다. 반대로 사랑 속에서 미래를 미리 계획하며 붙들어 놓고 싶어하는 사람은, 그가 그것을 시도하는 이 순간에 이미 심화를 위한 자신의 가능성을 위협한다. 사랑의 심화는 강압 없이, 오성 없이, 소망 없이, 탐욕 없이 일어난다. 욕구의 보상에 대한 탐욕은 끝내야 한다. 완벽한 영혼의 균형잡힌 안정이 있어야 한다. 심화가 이어지려면 말이다. 사랑의 심화는 노력만으로 얻어질 수 없다. 모든 노력과 희망, 소망, 기대, 동경이 끝나야 한다. 이런 비워진 자유로운, 그 어떤 강압도 없는 영혼의 상태에서 사랑의 심화는 이루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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