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5. 출생은 인생의 출발

하지만 어디서부터 출발해야 할는지, 세계는 너무 넓으니까, 내가 가장 잘 아는 내 나라에서부터 출발해야겠다. 그러나 내 나라도 너무 넓다. 차라리 내 고장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그러나 내 고장도 역시 넓다. 그렇다면 내가 사는 거리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가장 좋겠군. 아니, 내 가정이 좋겠지. 아니, 내 가족이 더 좋다. 이래저래 내 자신부터 출발해야겠다.
-엘리 비이젤의 '불타는 영혼들' 중에서-

태어남과 동시에 우리는 삶이라는 가장 위대한 선물을 받는다. 그리고 처음 맞이하는 생일날 우리에겐 그 속에서 살아야 할 환상적 세계가 선물로 주어진다. 아무리 우리가 가치를 무시하고 헛되이 소비한다 하더라도, 이들 선물이야말로 우리에겐 매우 실질적이며 귀중한 재산이 될 것이다. 그러나 토루가 그의 작품 <왈도>에서 말했던 대로, 우리가 삶에 대해 약간의 경외심을 갖지 않는다면 그 동안의 삶에는 관계없이 곧 죽음에 이르게 될 것이다. 에리히 프롬은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발언을 하였는데, 삶의 가장 큰 비극은 대부분의 인간이 완전히 태어나기 전에 죽는다는 사실이다.

나의 부모는 삶이란 가치가 잇는 것이라는 인식을 갖고 자연스럽게 살았다. 그러나 겉보기엔 나의 부모는 삶이 가치가 있다고 말할 어떤 근거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 같다. 사실 그들은 무일푼의 이탈리아 이주민으로 친지라고는 하나도 없는 이국땅에서 새로운 삶을 개척하고자 건너 왔었다. 그들은 새로운 문화에 쉽게 적응하기 위해서 영어를 배운 것도 아니엇고, 또 임기 응변의 재능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들은 애정과 믿음, 그리고 풍부한 유우머로 세파(世波)를 잘 헤쳐나갔다.

그들은 살기 좋은 곳에 정착한 후 집을 짓고 핑크빛으로 칠을 하고 내부는 하얀색으로 장식했다. 그리고 몇 개월 후에 정원은 꽃으로 만발하였고 계절에 맞는 과일과 채소도 열려서 생활은 생기가 가득했다.

새로운 친구로서는 처음으로 새들이 날아왔는데, 새들은 이리저리 날아 다니는 도중에 내 아버니에게서 맑은 물 한 모금과 영양이 풍부한 해바리기 씨를 언제든지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의 요리 솜씨는 뭇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그녀가 만든 그노치(gnocchi)와 라비올리(raviloi) 요리는 머랭과자처럼 입 안에서 사르르 녹을 정도로 맛이 있었다. 또한 어머니가 오랜 시간에 걸쳐 정성들여 만들었던 리소토 알라 밀라네세(risotto alla Milanese) 요리와 폴렌타(polenta)요리는 정말 일품이었다. 바그나 칼다에서 요란스럽게 끓던 올리브 기름과 마늘, 그리고 안초비(anchovies)가 끓는 냄새는 근처 수 마일에 있는 사람들의 입에 군침이 돌게 할 정도였다. 그녀는 가곡을 멋지게 불렀고, 크고 부드러운 눈은 언제나 친근감을 불러 일으켰다. 그렇다고 내 부모님이 특출나게 유명하였거나 혹은 나쁜 평판을 들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하루하루를 매우 평범하게 살았고, 대개 한 잔의 커피로 하루를 시작해서 팔짱을 끼고 인근 마을을 산책하는 정도로 하루를 마쳤다. 그들은 비극과 죽음도 마치 환희와 탄생을 받아들일 때처럼 평범하게 맞이하였다.

그들은 결혼 후 60여 년을 같이 살았고, 어머니는 82세에, 아버지는 86세에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돌아가실 당시 레이스 가운을 입고 있었는데 결혼할 때처럼 매우 아름다웠다. 아버지는 호리호리한 체구이면서도 86세 당시까지도 활동적이면서 정력적이었다. 죽음이 임박해 오는 것을 느끼면서, 아버지께서 마지막으로 바라던 것은 샌프란시스코의 북쪽 해안을 여행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거기서는 젊을 때의 이탈리아 생활을 조금이나마 회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어었다. 또한 일 주일 동안 라스베가스에 들러서 마지막으로 자동 도박기에 5센트를 넣고 큰 횡재를 잡고 싶다고 하셨다. 이 두 가지 소망은 결국 이루어졌다.

나는 그러한 환경 속에서 자라났다. 물론 항상 편한 것은 아니었다. 눈물과 좌절로 보낸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때에 우리의 육체와 영혼을 유지시켜 줄 수 있었던 것은 음악과 웃음, 그리고 아버지가 차도 가장자리에 심은 등나무, 그리고 어머니가 요리한 맛좋은 양배추 요리였다. 그래서 나의 어린 시절은 좋은 편이었고, 수 년이 지나는 동안 더욱 좋게 다져졌다.
나는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열정적인 사랑을 가슴에 담고 그것을 부끄럼없이 표현하게 되었다. 또한 웃는 법과 보는 법, 듣는 법, 그리고 마음 쓰는 　르 배웠다. 그리고 나서는 나의 세게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지는 것을 배웠고, 하루하루를 새로운 모험처럼 사는 것도 배웠다. 그래서 나는 삶을 통하여 무엇인가 얻어내는 것은 일종의 특권이며, 삶에 내 독특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나의 의무라고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 가족과 내가 어떤 특별한 생활 방식을 가지고 있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독특한 인간 존재이듯이, 그것은 전적으로 생활해 나아가는 과정상의 문제일 뿐이었다. 나는 성장해 가면서 선택이나 자유 의지, 혹은 자아 실현 따위를 알았던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이미 스스로 삶을 포용하려고 노력해 왔고, 그런 말을 들었을 때 나머지 것들도 알게 되었다.

그 후로 나는 교육받은 생활인으로서 미숙하나마 어떤 각성을 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행복해 하지 않으며, 이런 삶 속에서는 그것을 바라지도 않는다. 정신 건강에 관한 통계 자료를 살펴보면, 신경정신과 외래 환자 진료실에는 정신병 환자들이 놀랄 정도로 급증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미국에서는 324개의 정신병 연구소에 현재 약 30만 정도의 환자들이 수용되어 있다. 그리고 2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외래 환자 진료실에서 치료받고 있다. 또한 12만 5천 명의 만성 우울증 환자들이 대기하고 있으나, 지금의 치료 상태는 미흡하거나 전무한 실정이다. 미국인에게 있어서 일곱 명 중 한 명은 중년기에 접어들기도 전에 어떤 정신의학적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5세~19세 사이의 어린이와 청소년들 중에는 120만 명 이상이 정서 불안 상태에 있다. 그들 중 약간만이 명목상의 도움을 받고 있고 나머지 대부분은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

미국에서는 5만 명의 남녀가 매년 자살을 한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여덟 번 내지 열 번 정도의 자살을 기도한다. 통계를 살펴보면, 자살률은 놀랄 정도로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과거에는 65세 이상의 인구층이 가장 높은 자살률을 보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근래에 와서는 10대 초반의 청소년 자살률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이혼율도 그와 비슷한 수준에 달했고, 현대의 많은 부부들에게 있어서 결혼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실험이나 사회적 현상으로 여겨지고 있다. 어떤 주(州)에서는 이혼율이 결혼율을 앞지르기도 한다.

아동 학대는 유행병처럼 번져 어린이 입원가료의 중대한 원인이 되고 있다. 부모들이 자식을 학대하여 저능아로 만들어 버린다든지, 눈을 멀게 하고, 혹은 담배불로 아이를 지진다든지, 끓는 물로 화상을 입힌다든지, 혹은 다른 가혹한 벌을 가한다는 이야기가 자주 들려 오고 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더 이상 그런 일로 충격을 받고 싶진 않지만 그런 일은 끊임 없이 나를 경악케 만든다. 환희와 절망 중에서 하나만 택하라고 할 때에 왜 사람들은 그렇게 흔히들 절망을 택하려 하는지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나는 일상 생활을 해 나가면서 완전히 삶에 의욕을 잃어 무기력하게 보이는 사람과도 접촉을 하며 지낸다. 정서 불안의 중요한 원인은 자신의 인간성에 대하여 전적으로 무관심하다는 것에 있다. 대부분의 사람이 자신과 자기의 위치를 혐오하고 있으며, 가능하다면 자기 외의 다른 사람이 되고자 하거나 다른 위치에 있고 싶어한다. 그들은 타인을 의심하고 오직 자신에게만 집착한다. 그리고 자신이 고독하다고 느낄지라도 별다른 충격 없이 살고자 원하므로 더 높은 방어벽을 쌓는 것이다. 그들은 위험을 두려워하고, 신념이 결핍되어 있으며, 희망이란 낭만적인 허튼 소리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그들은 언제나 걱정과 두려움, 그리고 후회 속에서 살기를 원하는 것 같다.

그들은 지나치게 과거에만 집착하는 나머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다. 그리고 너무 냉소적이고 진실되지 못하며 지나치게 의심이 많아 사랑 또한 결핍된 상태이다. 그들은 부정적이고도 지독한 비난을 퍼붓기 좋아한다. 그리고 자신이 희망이 없는 지옥에 놓여 있다고 생각하면서 신은 무관심하고 부모는 신경 과민이며 사회는 병들었다고 불평한다. 그들은 자신의 잠재 능력을 알아채지 못하고 받아들이려 하지도 않으며, 다만 자신의 능력을 일찍 단정지어 버리고 거기에서 안주할 뿐이다. 시간이 영원할 것처럼 허송세월은 해도 자신의 비참한 상황을 해결하려는 어떤 노력도 결코 하지 않는 것 같다.

그들은 시간이 유수처럼 스로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며, 어느 누구도 이 세계로부터 벗어나서는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잊어 버리고 있다. 그들은 자기의 존재도 우연한 출생과 공포를 동반하는 죽음 사이의 일부분으로 생각하며, 가능하면 고통 없이 살아가려고 한다. 그들은 삶의 양식이나 개인의 자기 실현 따위에는 거의 무관심하다. 그들은 사후 세계나 재생, 그리고 활력의 재생산 따위 등 막연한 탁상 공론에만 열을 올릴 뿐 본질적인 진실은 무시하고 있다. 즉, 자신은 지금 살아 있는 존재이고 살아야 할 가치가 있으며, 현재의 자신이 전부가 아니고 미래의 자신을 창조함에 있어서 필요한 기본 토대가 된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은 언제든지 다시 태어날 수 있으며, 자신의 삶을 재창조하여 평화와 환희, 그리고 사랑을 구가하며 살 수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다.

확실히 그들이 이러한 현실에서 도피한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들은 변화와 환희, 성장에 관하여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삶은 막연하면서도 형이상학 적인 그 무엇에 불과하다. 과학자나 교육자들도 회피하며, 주로 말만 장황한 철학자나 신비적 시인들이 정의를 내리는 그런 것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삶에 대한 철학적이고 시적인 결론은 당분간 몇 사람의 호기심을 끌지만 애매한 어의상의 넌센스로 보일 뿐이다. 그래서 이것은 '고통스런 삶의 사실들'로서 깊이 반영되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모호하게 만들 뿐이다.

지난 20년 동안 인간의 삶에 대한 연구는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해 주었다. 인간의 삶은 행동주의 학파의 학자들 간에 주요 관심사가 되었는데, 그들은 삶을 누리는 생명체와 인간의 행동에 대한 관찰에 몰두해 왔고, 특히 일상 생활에 나타나는 인간의 행동을 관찰했다. 그들은 감정상으로 표출된 현상을 분석해 보고, 갖가지 생활 방식을 관찰해 보았으며, 또한 관찰 가능한 여러 가지 감정의 현상들, 즉 기쁨(shultz)이나, 외로움(moustakas), 용기(tillich), 고독(satre), 사랑(fromm), 자아 실현(maslow), 그리고 죽음(kubler-ross) 등에 대한 가치 평가를 시도해 보았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유용한 실질적인 이득을 얻어냈다. 그들은 우리로 하여금 삶과 죽음의 역할에 대하여 좀더 생각하게 하였고, 생존을 위하여 선택하여야 할 여러 가지 대안들을 제시하게 하였다. 또한 그들은 우리가 선택하는 삶의 질이나 양식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몇몇 제안도 하였다. 이것으로 우리는 인간성이나 인류모두에게 필요한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 등에 대하여 전반적으로 새롭게 전망해 보았다.

버크 미니스터 풀러는 인간성에 관해서 80여 년의 연구 끝에, 삶이란 그것이 어떠한 것이든 간에 무게가 나가는 것이 아니고, 만질 수도 없으며, 포장할 수도 없고, 자로 잴 수도 없는 것이라고 우리에게 확언하였다. 그가 느끼기에 삶이란 확실히 육체는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몸무게를 40파운드나 줄인다 해도 자신은 그대로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육체란 근본적으로 물과 찌꺼기라고 말한다. 그리고 삶이란 의식이라고 믿고 있다. 물론 그가 말하고 있는 의식이란 단순한 이해 정도라기보다는 더 많은 것을 포함한다.

인간은 다른 동물처럼 쉽게 정의 내리지는 못한다.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분시켜 주는 것은 바로 두뇌이며, 이는 다른 생명체의 그것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이 두뇌의 주요 기능은 환경으로부터 중요한 기능을 받아서 해석하고 분류하고 다시 저장하는 것이다. 이런 활동의 결과로 우리의 정신이 탄생하는 것이다. 정신은 감각 기관을 통하여 감지된 경험에 의하여 성장한다. 그리고 이 경험을 통하여 우리 개인의 세계도 창조된다. 의식이 살아 있는 한 우리는 계속해서 환경을 이해하고 자신의 삶을 형성할 수가 있다. 이것은 계속되는 능동적인 과정이며, 우리는 끊임없이 다가오는 새로운 경험들을 받아들이면서 어느 정도까지 성장하게 된다. 인생의 각 단계마다 더욱 능동적으로 경험을 받아들이게 됨에 따라서 변화하는 세게에 대해 개인적으노 적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 각 개인은 계속적으로 변화하는 우주의 한 부분으로 스스로를 끊임없이 개조하면서 독특한 한 개체를 만들게 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에게 놓인 주요 과제는 자신의 자아를 발견하고 개발하며 계속 유지시키는 일이다. 이것을 하기 위해선 우리는 충분히 민감하게 깨닫고 융통성이 있어야 한다. 또한 예리한 유우머 감각도 필요하다. 그러나 그렇게 했다고 해서 쉽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복잡한 사회에서 살고 있으며 또한, 주위에는 자기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 또한 우리로 하여금 계속적으로 세상에 적응하도록 요구할 것이다.

우리의 부모나 친구, 그리고 연인들은 그들 자신의 편의와 안락을 위하여 사랑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우리를 속박하고 왜곡시키려 한다. 사회는 또한 우리를 사회의 필요에 순응하도록 억압하고 사회의 좁은 틀에 우리를 몰아 넣으려 한다. 교육은 흔히 우리에게 필요 없는 지식만 주입시키고, 우리가 배운 지식의 활용법보다는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를 가르쳐 준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또한 제도란 우리를 세뇌시킬 뿐이며, 두려움과 수치심, 죄의식만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결국 우리가 진정한 우리 자신이 될 수 없다고 해서 조금도 놀랄 것이 못 된다. 왜냐하면 이상과 같은 여러 가지가 우리를 방해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철학자이며 극작가인 장 폴 사르트르가 그의 걸작 <출구는 없다(No Exit)>에서 '타인은 곧 지옥이다'라고 자신 있게 결론지은 이유를 알 수 있다.

인류의 역사, 특히 가치 기준이나, 과학 기술, 종교상의 믿음, 그리고 정치 체계 등을 고려해 보면, 우리가 얼마나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무력해 있는지 알 수 있다. 이러한 연구의 결과로서 우리 자신은 우리보다 더 큰 어떤 권력에 끌려다니며, 융통성이 없고, 자기 중심적이며, 무기력하고, 또한 공포에 질린 희생물에 불과하다는 슬픈 나상(裸像)을 보게 된다.

지난 수 세기 동안 우리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과학적 발전을 이룩하였고, 심지어 우주의 영역에까지 확장되어 왔다. 그러나 아직도 이 지구상 어느 구석에서 일어나고 있는, 인간의 기본적인 생계유지와 인간의 존엄성을 가지고 살 권리를 보장해 주는 입법을 제정하라는 국민들의 요구 또한 항존해 왔다. 이는 바로 완전한 자아 실현, 나아가서는 인간 실현을 위한 필수 조건이다.

현재의 정치 체계는 인류의 평화와 자유에 공헌을 해 왔다고 자처하면서 견강부회적(牽强附會的) 태도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현재의 정치 체계는 우리가 두려워하고 비난한다고 해서 그 정치 체계보다 더 평화적인 것도 아니고, 편견이 없는 것도 아니며, 무력을 덜 사용하는 것도 아니다. 한 역사를 살펴보건대 인간은 가장 처참한 시기에 덧없는 희생물이 되어 왔다.

최근의 종교사에 관한 연구를 살펴보면 결코 낙관적이거나 성공적인 결론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 주위엔 신과 교회로부터 버림받고 따돌림받았다고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으며, 무관심과 증오, 편견, 공포, 폭력, 그리고 대량 학살까지도 신의 의자라고 합리화시키려는 수많은 광신자들도 있다.

이와 같이 인류가 만들어 낸 제도에 대하여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우리가 미래에 어떤 희망을 갖고 우리 인간이 아닌 어떤 다른 대행자에 그것을 기대해 왔다는 사실을 보고 놀라게 된다.  우리는 지금까지 실패해 왔으며, 또한 앞으로도 계속해서 실패할 것이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어떤 철학자나 과학자는 인간의 종말이 임박해 왔다고 경고하기도 한다.  우리는 앞으로 병들고 무기력해질 따름이며, 도움을 몹시 필요로 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  우리는 일종의 의학적 행동 유형을 하도록 강요받았는데, 우리가 인간으로서 완전한 기능을 갖추는 데 실패한 이유는 우리를 '치료'하여야 하는 병리학에 오히려 그 이유가 있다. 우리는 다람쥐 쳇바퀴 돌 듯 계속하여 수레를 돌리며 그 수레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존재가 되고 만다.

만약 우리가 인간에 대한 그러한 표현을 옳다고 인정한다면, 우리가 만들어 낸 감정적, 육체적, 그리고 생태학적인 폐품들을 분해하여 다시 재생시킬 힘을 얻어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결코 우리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믿음을 회복할 수 없을 것 같다.  아마도 우리가 예상하고 있는 미래에 대한 비관적인 전망은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는 현재 인간의 잠재력에 대하여 충분히 알고 있고 또한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미움과 공포, 고통, 굶주림, 전쟁, 그리고 절망 등을 완전히 떨쳐 버릴 수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나는 과거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과거에 얽매여야 되는 죄수는 아니다.  우리는 현재 이 순간부터 다시 출발할 수 있다.  이것으로 준비는 다 된 것이다.

타인을 비난하지도 말아야 한다.  자신도 비난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행동을 주의깊게 살펴본다면,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정서 불안이나 무관심, 이해심의 결핍, 그리고 변화에 대한 적극적 대처의 부족 등은 바로 우리 자신의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가 말하는 '그들'은 사실은 바로 우리 자신인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자신의 함정을 파고 있으면서도 그곳에 자신이 빠질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

어떤 일이 성취되지 못했을 때 그 책임은 바로 우리에게 있으며, 오해가 있다면 그 또한 자신에게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정서상의 고민과 번뇌 또한 스스로 택한 것이다.  우리가 본래의 자아를 찾지 못한다면 우리는 변화할 수 없고, 또한 자신의 비자아로 인하여 고통을 받아야만 한다.

어느 누구도 우리를 가르치거나 변화시킬 수 없으며 오직 자신만이 할 수 있을 뿐이다.  어느 누구도 우리에게 평화나 환희를 가져다 주지 못한다는 것을 자기 자신 스스로 느껴야 하는 것이다. 공포나 환희 혹은 슬픔 등의 세계는 오직 자기만의 세계이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자아를 실현시킬 수 없다.  오직 자기 자신만이 완전한 자아를 실현한다는 과제를 짊어질 수 있는 것이다.  오직 자신만이 자아를 포용하며 새로 시작할 수 있을 뿐이다.  오직 자신만이 인간애로 충만한 세계에서 살기를 갈망할 수 있다.

자기 스스로 삶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은 오래 전부터 있어 온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을 받아들이려한다면 자신은 변화를 겪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아 실현이 이룩되지 못했다고 느낄 때 어떤 고통이나 허무감에 빠져 버릴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자아 실현을 추구하는 데에는 당혹감이나 불확실성, 그리고 어떤 의무감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이제 결국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은 타인의 것이 아닌 자신의 것이다.  우리 자신을 현재의 자신 그대로, 즉 자아 실현을 하기에는 너무 나약하고, 절망적이며, 공포심에 가득 찬 무기력한 실패자로 받아들이는 것이 훨씬 용이하다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인간이 태어날 때의 개성은 단지 아직 실현되지 못한 잠재적인 그 무엇에 불과하며, 수천 가지의 새로운 가능성만이 존재할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느 때라도 제2의 탄생을 할 수 있으며, 아직 이루지 못한 자아 실현의 과제를 그 때 수행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제2의 탄생도 제1의 탄생과 같은 원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 대부분이 실현되지 못한 잠재적 능력을 가진 그 무엇이며, 또한 그 실현을 우리에게 기대하고 있다. 우리가 그 책임을 떠맡아야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와 모든 인간의 상태를 명백히 제시함은 자신이 존재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며, 주요한 존재 목적이고, 유일한 희망이다.  우리가 처해 있는 위치나 상태를 막론하고, 각자가 완전한 기능을 담당하는 전체 속의 한 부분이 되려고 하지 않는다면 세상의 잠재력은 영원히 묻혀 버릴 것이다.  우리가 꾸준히 자아 실현을 위하여 노력한다면, 우리는 인생의 매 순간순간이 실현된 그 상태만큼의 가치가 있게 된다.  이 목표는 도달할 수 없는 비현실적인 하나의 낭만적인 이상으로 보일는지는 모른다.

이상을 실현한다는 것은 곧 좌절을 경험한다는 말과도 통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감지할 수도 없는 것, 즉 일종의 환상을 다루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우리의유일한 희망이 실현되지 않은 미지의 자아를 향하여 환상적인 항해를 해 나아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그 여행 후 어디에 다다르게 될지, 혹은 그곳에 도착했을 대 과연 무엇을 발견하게 될는지 확신하지 못한다.  단지 우리가 현재 하려는 것은 적어도 스스로를 바로잡는 일이다.  변화를 겪는다는 것은 기껏해야 불안한 모험에 불과한 것이라고 믿고 있다.  우리는 환상이란 어린애의 장난일 따름이며, 환상을 따르는 것은 천진난만한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현되지 못한 자아도 우리의 주목을 받고자 한다는 것은 재미있는 현상이 아니겠는가.  그런 사실을 더 이상 간과할 수는 없다.  자아가 실현되지 못했다고 느낄 때, 우리는 전진을 하든가, 아니면 후퇴를 하든가, 혹은 혼란과 불안, 그리고 좌절 속에서 살아야 한다. 우리는 무엇인가 놓쳐 버린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아채리고 그것이 무엇인가를 열심히 찾아내려 한다.  그러나 성장에 대한 보상이 기껏해야 아지랑이 같은 환상이라는 사실, 우리는 거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며 과거에는 늘 실패해 왔다는 사실, 지성은 우리를 현혹시키고 감성은 우리를 혼란시키며 성장으로 향하는 다른 여행자들도 계속해서 우리를 방해한다는 사실 등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성장을 향하여 행진하고 있다.

우리의 여행은 안내자조차 없는 자기 혼자만의 여행인 것이다.  따라서 오직 자신의 힘에 의지해야 한다.  그 자신의 힘이란 결국 우리를 창조와 선택, 해방, 그리고 변화시키는 자연의 본능인 것이다.  우리는 인간화라는 과제에 복종해야 하며, 우리가 추구하는 이 길이 우리를 목적지로 인도해 줄 것이라는 희망 속에서 인간화 과정에 전직인 신뢰를 가져야 한다.

우리가 죽어서 창조주 앞에 섰을 때,

"왜 너희들은 구세주나 위대한 지도자가 되지 못했는가?"
"왜 너희들은 삶의 커다란 신비에 대해 해답을 얻지 못했는가?"

등의 질문은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랍비에 대해 엘레 비이젤은 이야기하고 있다.

창조주의 질문은 단순한 것이다.  즉, 너는 자신을 성장시킬 잠재력이 있으면서도 자아 실현을 위해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는가?

그러면 우리의 과제 또한 명백해진다.  즉, 가능한 한 많은 환상을 현실화시키는 것이 그것이다.  결국 우리가 현재 누리고 있는 현실은 한때는 하나의 환상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어디에서 출발할 것인가? 지금 이 순간이 곧 출발이다.  우리는 과거를 버리고 현재를 포용한다.  우리는 각자 완전한 인격체로 이끌어 줄 가능 가치 있고 유일한 소유물인 '자아'로부터 시작한다.  즉, 자아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에서부터 출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이젤이 인용한 랍비의 현명한 충고에 주목하자.

"자신으로부터 시작하자." [레오 버스카글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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