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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 각자의 시간과 공간을 인정하자 심리학 용어에 ‘조하리창’이라는 것이 있다. 조하리라는 심리학자가 인간관계에서 서로를 열어보이는 정도에 대해 연구한 것을 일컫는 말이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인간관계는 먼저 나도 알고 너도 아는 부분이 있다. 그 다음 나는 알지만 너는 모르는 비밀스러운 부분이 있고, 반대로 나는 모르지만 너는 아는 부분이 있다. 그리고 나도 모르고 너도 모르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일지라도 상대방의 모든 것을 다 완벽하게 알 수 없으며 또 알려고 해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특히 이것은 부부 사이에 반드시 필요한 교훈이 아닌가 한다. 여자의 거의 맹목에 가까운 정도의 헌신이 너무도 사랑스러워 결혼한 남자가 있었다. 연애할 때 남자는 늘 꿈 속에 살고 있는 기분이었다. 아주 사소한 일들도 다 남자에게 의논한 후 결정했으며 심지어 옷차림이나 화장, 머리 모양까지 남자의 취향에 완벽하게 맞추었다. 남자는 마치 여자의 후견인이나 된 양 자랑스러움을 느꼈고 친구들에게 그 점을 으스대기도 하였다. 두 사람은 곧 결혼했고 말 그대로 꿈처럼 달콤한 신혼 시절이 흘러갔다. 그리고 마침내 꿈에서 깨어나 현실에 문을 떴을 때 남자는 조금씩 뭔가가 잘못되어 간다는 찜찜한 느낌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아내는 여전히 순종적이고 그를 왕처럼 대해 주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결혼생활의 모든 현실적인 문제들을 그가 해결해주기만을 바랐다. 그러면서 남자가 조금만 소홀한 눈치를 보여도 눈물을흘리며 서운해 했다. 그 때마다 하는 대사도 정해져 있었다. “나는 널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고 있다.” “나한테는 이 세상에서 오직 너만이 삶의 보람이고 목표이다.” 등등. 그러면서 교묘하게 남자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알고자 했고 만일 조금이라도 그렇지 못하면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희생자의 얼굴을 하고 남편을 은근히 협박했다. 그런 여자에게 부담을 느낀 남자가 아무리 ‘나에게도 프라이버시가 있다. 넌 그걸 인정해야 한다’고 말해봤자 소용없었다. 남자는 여자의 관심을 자기로부터 돌리기위해 취미생활도 권하고 운동도 하라고 일렀으나 여자는 “ 난 다만 기꺼이 너의 노예가 되겠다. 그러니 능금나무 아래 오로지 나하고만 있어 달라.”고만 노래했다. 결국 그는 자신이 꼼짝없이 올가미에 걸려들었다고 생각했고, 그 순간부터 결혼생활은 그에게 진절머리나는 전쟁터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들과 전혀 반대인 커플도 있다. 여자는 남자의 자상함과 거의 아버지 같은 배려에 이끌려 결혼했다. 연애할 때 남자는 반드시 여자를 집 앞에까지 바래다 주었으며 돌아설 때는 ‘오늘도 무사히 배달을 끝냈습니다’하고 환하게 웃곤 해서 여자를 즐겁게 했다. 무슨 기념일 같은 것은 한번도 잊는 법이 없었다. 데이트를 할 때면 여자가 오늘 하루종일 누구를 만나 무엇을 했는지 친절하게 묻는 일을 빠뜨리는 법도 없었다. 여자는 남자의 사람에 흠뻑 취해 이 사람하고라면 기꺼이 일생을 함께 해도 좋으리라고 여겨 행복한 마음으로 결혼했다. 이미 이쯤에서 독자들은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눈치챘을 것이다. 예상대로 남자의 자상함과 아버지 같은 배려는 독선과 집착으로 변했고 여자는 곧 자신이 결혼이라는 창살없는 감옥에 너무 겁없이 발을 딛고 말았다는 것을 깨닫지 않으면 안되었다. 도무지 처음의 아름답고 순순한 관계는 다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한탄할 사이도 없이 대부분의 부부에게 결혼은 너무 일찍 현실이라는 싸움터로 변하곤 한다. 그 중에서 앞서 예를 든 두 사람은 가장 나쁜 결혼의 예에 속한다. 난 널 사랑하므로 너의 모든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하나의 강박관념일 뿐이다. 흔히 그것을 상대에 대한 사랑으로 착각하고 마치 그것이 전가의 보도나 되는 양 휘둘러대는 사람들에게 결혼생활은 언제까지나 비참한 전쟁터일 뿐이다. 누구나 자기 자신조차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한 존재가 인간이다. 그런데도 단지 상대를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상대방의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독선일 뿐이다. 사랑하는 사이에서도 프라이버시는 존재하며 아무리 부부사이에도 서로의 독립된 공간은 보장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부부란 함께 있는 시간이 필요하지만 때로는 혼자 후퇴해 자기만의 시간과 공간을 가질 때 서로를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다 볼 수 있게 되는 법이다. 조하리창의 교훈은 그래서 필요하다. [양창순] 양창순 님은 연세대 의대와 대학원을 졸업하였으며 의학박사로 정신과 전문의다. 현재 서울 백제병원 부원장이며, 연세대 정신과 외래부교수이다. <표현하는 여자가 아름답다>, <남자를 알아야 사랑이 자유롭다>, <사랑을 느낄 때 던져야 할 질문들> 등의 저서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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