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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을 여행하다보면 차 뒤편에 재미있는 문구들을 자주 보게 된다. 애국 구호나 회사 선전 등 상투적인 것들도 있지만 더러는 미국적 해학이 담긴 글귀도 많다. 재치나 유머에 흐뭇한 웃음이 절로 난다. 제법 철학적 뉘앙스도 풍긴다. '내겐 다섯 아이가 있습니다' . 조심운전을 하고 있다는 선언이다. '내 운전 마음에 듭니까?' 위반과 얌체짓을 않겠다는 약속이다. 이런 모범생과는 달리 협박적인 뉘앙스가 담긴 글도 있다. '이 차는 지난해 3만달러의 세금을 냈다' . 대형트럭 뒤에 큼직하게 써놓았다. 좀 시끄럽고 귀찮더라도 찍 소리 말라는 얘기다. 미국에서 고액 납세자는 애국자로 통한다. '웃지마, 할부가 끝난 차야' . 고물차에 쓴 글귀다. 고급 신형차라고 뻐기지 말란 소리다. 미국은 온통 월부 빚쟁이 생활이다. 거기에 비하면 헌 것이라도 내 차를 모는데 무슨 소리냐. '우리 집에 신형 벤츠가 있다' . 헌차를 몰면서 이 역시 애교스럽다. '내 돈은 예일대학으로 간다' . 덜컹거리는 고물차에 붙은 스티커다. 기부금을 낸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집 아이가 거길 다닌다는 하소연이다. 미국의 명문 사립대의 등록금은 살인적이다. 등록금만도 연간 수만달러다. 거기다 부대비용까지 합치면 웬만한 재벌 아니고는 살림 거덜날 판이다. 정말이지 허리가 휘청거린다. 고물차라도 몰 수 있는 형편이면 다행이다. 재단의 수익금, 독지가들의 기부금, 정부 지원 연구용역, 기여금 입학제, 요즘은 대학 벤처기업까지 돈 나올 곳이면 다 뒤져도 명문대 하나 유지하는 데는 천문학적 돈이 든다. 명교수 초빙만이 아니다. 연구비, 첨단 실험 기자재 등 돈 타작을 해도 모자란다. 등록금이 비싸지 않을 수 없다. 대학도 미안해 이런 스티커를 만들었겠지. 물론 이것도 공짜가 아니다. 대학 상점에서 제법 비싸게 판다. 요즘 우리 대학도 등록금 인상파동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총장실을 점거, 농성하는 학생들을 보노라면 마음이 착잡하다. 미안하고. 대학도 딱하고 학생도 딱하다. 우리에겐 사회 독지가도 그리 많지 않다. 어쩌다 콩나물 할머니의 기부금이 감동적인 것도 우리에겐 기부금의 전통이 없기 때문이다. 세금을 많이 내 정부가 큰 지원을 할 수 있는 형편도 아니고 우리 정서상 기여금 입학제도 안되고, 이젠 그나마 대기업에 기댈 형편도 안된다. 학부모 호주머니밖에 믿을 곳이 없는데 학생들은 결사 반대고. 이것이 우리 대학의 현주소다. 아직 세계 1백대 명문대에 이름조차 올리지 못하고 있다. 창피하다. 하지만 그건 당연한 결과다. 한 마디로 대학도 돈이다. 우수한 인재도 필요하지만 그 인재들이 마음껏 공부할 수 있게 하는 건 역시 돈이다. 돈 없이는 대학도 안된다. 싼 게 비지떡이란 말은 대학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우리 한국 대학은 양적으로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그러나 질적인 면에선 생각하기조차 부끄럽다. "그런 대학이면 어때, 간판만 따면 되지. " 하긴 지금까지는 그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앞으로의 시대는 간판이 아니다. 질이다. 진짜 실력대결이다. 우리 대학, 이대로는 안된다. 이건 국가 장래를 가늠할 중대사다. 모든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 학생들이 등록금 인상 반대 데모만은 하지 않게 모두가 중지를 모아야 한다. 그리고 학부모도 아이 하나 대학 시키는 걸 가볍게 생각하면 안된다. 단단한 각오가 돼 있어야 한다. 예일대 졸업식은 그래서 인상적이다.학위 수여식이 끝나면 총장은 졸업생 전원을 기립시킨다. 그리곤 스탠드를 메운 가족들을 향하게 한다. "빈털터리가 된 부모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십시오. " 순간 학생들은 학사모를 하늘 높이 치켜 올리며 감사의 환성을 소리껏 외쳐댄다. 스탠드의 가족도 모두 일어서 박수로 답례한다. 눈물이 글썽한 부모도 있다. 참으로 감동적이다. 그간의 힘들었던 노고가 말끔히 가시는 듯하다. "정말 애쓰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곧 갚을 거예요. " 이렇게 맺는 총장의 감사 메시지가 인상적이다. 밑천을 많이 들였으니 벌기도 잘 하겠지. 이시형 <정신과 의사> [중앙0009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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