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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한국 성문화의 현상 및 진단 요즘 책방에 가보면 성에 대한 서적 코너가 따로 설치돼 성에 관련된 담론이 만개하고 있다. 또한 포스트모더니즘이나 욕망의 문제를 언급하며 이성과 합리성의 시대는 가고 감성과 본능의 시대가 이미 도래했다는 주장이 활발히 개진되고 있다. 새로 나오는 소설이나 영화를 봐도 성을 다루지 않은 작품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만큼 우리 문화계는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성에 대한 표현의 자유를 만끽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남보다 조금 먼저 말문을 열었다는 죄로 세계에서도 유례가 없는 필화사건(유통제한을 목적으로 한 이른바 '외설재판'이 20세기 중반까지 몇 번 열렸던 적은 있지만,『즐거운 사라』사건처럼 작가를 현행범으로 몰아 전격 구속하고 실형을 언도한 재판은 세계에서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처음 있었던 일이다)에 걸려들어 지나친 대가를 치르고 있는 나의 신세가 한탄스러워 지는 것이다. 그러나 요즘 발표되는 작품이나 담론의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직도 성을 현학적 이론으로 포장하려 들거나 일종의 엘리트 의식 차원에서 거론하는 등 내가 바라는 '솔직한 고백'과 '당당한 대리배설'로서의 성적 담론을 찾아보기 어렵다. 아직도 교훈주의를 바탕에 깔고 성을 곁다리 소재로 이용하거나, 성을 학술적 측면에서만 '점잖게' 조감하여 담론의 방향을 무겁고 품위 있는 쪽으로만 몰아가고 있다. 다시 말해서 성에 대한 이중성이나 '성 알레르기' 증상을 바탕에 깔고 성에 대한 담론을 '상품화'시키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된다. 최근에 폭발하고 있는 지성인(?)들 사이에서의 성에 관한 '품위 있는' 논의는, 우리 사회의 비합리적 풍토와 전근대적 수구성에 비춰볼 때 너무 붕 떠 있거나 부풀려져 있어 현실감이 없다. 마치 성이라는 것을 재미 삼아 씹고 있는 듯한 느낌마저 준다. 다시 말해서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보통 사람들의 실제적 성 행태와 고뇌를 담지 못하고 오직 논의를 위한 논의가 돼 가고 있는 것이다. 나는 특히 이성과 합리성의 시대가 이미 갔다고 말하면서 감성과 감각 위주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주장에 당혹감을 느낀다. 서구의 사상계를 대상으로 한 말이라면 그 말은 옳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그런 지적이 한국 사회에는 해당되기 어렵다. 한국 사회는 합리성의 회복을 목표로 하는 근대 계몽주의 사상조차 제대로 토착화돼 있지 못한, 합리적 지성의 수준이 지극히 열악한 사회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도 수구적 봉건윤리가 도덕적 테러리즘의 양상으로 나타나 문화발전을 가로막고 있고, 종교적 편견이나 도덕적 편견이 합리적 절차성을 무시한 채 새로운 권위주의의 양상으로 개개인의 자유권을 억압·박해하고 있다. 최근 들어 동성애에 대한 담론이 폭발적으로 분출되어 하나의 유행을 이루고 있는 것도 같은 관점에서 지적될 수 있다. 물론 동성애에 관한 담론이 성에 대한 생산적 논의를 촉진시켜주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성에 대한 자유로운 표현조차 할 수 없고 성애의 다양한 묘사가 '미풍양속을 해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처벌받는 상황에서, 동성애에 한정된 엘리트주의적 시혜의식(施惠意識) 차원의 논의는 또 다른 현학 취미에 불과한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떨쳐버리기 어렵다. 포스트모더니즘등 첨단적 서구사조가 사대적(事大的) 입장에서 소개되고 있는 이 땅의 문화상황은, 기실 서구 18세기의 계몽주의 사상조차 제대로 수용하지 못하고 있는, 척박하기 이를 데 없는 '합리적 상식 부재'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1995년에 나는 전작 에세이집『운명』을 출간한 바 있고, 1997년에는『성애론』을, 그리고 최근에는『인간』을 출간하였다. 이 책들은 한국인들이 모든 것을 체념적 운명론으로만 돌리고 합리적 논의를 회피하는 중세기적 봉건사상에 젖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수구적 봉건윤리와의 싸움이 새로운 사회운동으로 전개되어야만 한국의 운명은 바뀔 수 있다"는 주장을 펼친 일종의 계몽서이다. 지금까지 내가 한국의 지성인 사회에서 활동하며 얻은 결론은, 겉으론 아무리 자유·민주를 외치고 개방적 사고 및 '세계화'를 주장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속을 들여다 보면 대개는 다 봉건적이고 폐쇄적인 유교윤리에 바탕한 권위주의적 사고 방식을 견지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수구적 봉건윤리는 권력과 야합하여, "자유보다 통제가 아름답고, 개인보다 전체가 중요하며, 쾌락보다 금욕이 의미 있다"로 끊임없이 국민들을 윽박지른다. 그러면서 엘리트 독재주의에 바탕한 도덕적 순치주의(馴致主義)로 국민들을 몰아가, 개개인의 운명을 소극적이고 몰개성적인 '눈치보기'로 일관하게 만드는 것이다. 어쨌든 그래서 나는 지금 지극히 어지럽고 우울하다. 어떤 이는 내가 시대를 앞서 나갔기 때문에 코미디같은 필화사건을 겪고 직장에서도 한때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며 나를 위로한다. 하지만 내가 그동안 일관되게 주장했던 것은 성에 관한 것이든 뭐든 간에 획일적 통제보다는 자유로운 개성을 존중하는 합리적 논의풍토의 정착이었고, 그것은 문화적 선진국에서는 이미 한물간 구시대의 패러다임일 수도 있는 것이었다. 내가 보기엔 합리성과 개방적 사고, 그리고 '세계화'가 구두선처럼 외쳐지는 현재의 우리 사회는, 사실상 봉건윤리와 문화적 쇄국주의의 울타리 안에 갇혀 있는 문화적 후진사회다. 그래서 새로운 모색과 실험을 해 보기에 앞서 나는 계속 18세기식 '계몽'을 해야만 할 운명인 것 같아 저절로 신세한탄이 나올 수밖에 없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권위주의적 분위기가 이미 사라져버린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권위주의적 풍토는 여전히 살아 있다. 이데올로기적 권위주의가 도덕적 권위주의로 대체되었을 뿐, 표현의 자유에 대한 억압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낡은 형태의 박해가 쇠퇴했다고 만족스럽게 자축하는 것보다는 새로운 형태의 박해에 항거하는 것이 지식인의 참된 사명이요 의무이다. 특히 '자유로운 성'에 대한 솔직하고 적극적인 논의는, 이 땅의 문화적 봉건성과 폐쇄성은 물론 정치적 낙후성까지 깨뜨릴 수 있는 새로운 수단이 된다고 나는 본다. 자유로운 성의식은 개방적 사고와 창조적 상상력에 바탕한 참된 자유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촉매제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성의 자유, 또는 성에 대한 표현의 자유는 한 나라의 정치적 민주화와 분배정의의 실현, 사회복지, 다양한 문화적 가치 발달과 정비례 관계에 있다. 이것은 역사의 전개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난 현상이다. 성에 대한 억압과 '이중 잣대'가 없어지고 성에 대한 법의 간섭이 최소화될수록, 그 나라의 구성원들이 누리는 정치적 자유가 확대되고 불평등이 축소되어 경제적 재분배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것은 프랑스나 북유럽 사회 등 사회복지 제도가 완성도 높게 이루어진 나라들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과거의 성은 전제군주나 귀족의 전유물이었고, 역사가 시민사회로 발전함에 따라 사회 하층구조로 내려와 누구나 즐길 수 있게 되었다. 특히, 경제가 발전할수록 성적 자유에의 갈구는 커지게 마련인데, 그 까닭은 경제 형편이 열악할 때는 주로 식욕에만 머물러 있던 일반국민들의 관심이 경제 형편이 나아짐에 따라 성욕 쪽으로 이동해 가기 때문이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성문화에 대한 수요가 차츰 높아지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인데,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1만달러 가까이
된다고 자랑하면서 한편으로는 '전통윤리'를 방패삼아 가난했던 조선조
시대의 봉건윤리를 국민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진정 넌센스가 아닐 수
없다. 1960년대 초의 1인당 국민소득이 80달러 정도였으므로 조선시대에는
아마 50달러도 채 못 됐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지금은 '식욕의 시대'가
아니라 '성욕의 시대'요, 또한 '성욕의 대리배설'로서의 '놀이의 시대'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은 이제 단순히 쾌락에 관련된 문제도 아니요, 윤리에
관련된 문제도 아니 특히 성의 즐거움은 현대에 이르러 점점 더 간접적인 대리배설 또는 대리만족의 양상으로 추구되는 경향이 있다. 이른바 성의 해방은 행위로서의 해방이라기보다는 시각을 위주로 한 '느낌으로서의 해방' 측면에서 더 강한 실현가능성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성에 대한 촌스러운 금기가 차츰차츰 허물어져가면서 '성적 표현물'을 통한 대리만족의 추구가 사회문화 전반을 지배해가고 있다. 따라서 성의 자유는 '성적 표현의 자유'와 동일선상에 놓일 수밖에 없고, 거기에 따른 '표현할 권리'와 '읽고 볼 권리'의 보장이 당연한 인권의 측면에서 적극적으로 논의될 수밖에 없다. 성 자체 또는 성을 각자의 개성대로 즐기는 방법에 대한 '도덕적 선입관'이나 편견, 심지어는 중세기의 마녀사냥식 '모랄 테러리즘'이 횡행하는 사회는 대부분 문화적 후진국들이다. 말하자면 상식과 지성이 통하지 않고 이중적 위선만이 난무하는 사회인 것이다. 문화적으로 후진된 사회일수록 '성'이란 말만 나와도 그 말을 공식적으로 꺼낸 사람은 기득권 사회에서 멸시되거나 무시되어진다. 그러면서 성은 점점 더 음지(陰地)로 숨어 들어가 더욱 변칙적으로 창궐한다. 그런 사회에서 성에 대한 공개적 문제 제기는 기껏해야 이중적 선정주의에 머물 수밖에 없는데, 이중적 선정주의란 이를테면『즐거운 사라』사건 때 검찰이 문제삼은 부분을 언론이 공개하여 판매 부수를 늘이면서, 한편으로는 작가를 질타하기도 하고 검찰에도 문제가 있다고 하며 문제의 핵심을 회피해 가는 수법을 말한다. 또 실컷 야하게 묘사해놓고 나서 뒤에 가서 "이러면 안 된다"라거나 "성에 탐닉하고 보니까 허무하더라"는 식의 도덕적 코멘트만 붙이면 면죄부를 받는다고 보는 교훈주의적 문학풍토 또한 이중적 선정주의의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별나게 성에 관심이 많고 성욕 또한 유난히 강하다. 세계에서 정력제가 제일 많이 판매되는 곳이 바로 한국이고, 신문이나 잡지를 봐도 '성상담'란이 꼭 끼어 있는 나라도 한국이다. 그런데도 '교수'가 성에 대해 조금 솔직한 발언을 남보다 먼저 했다고 해서 금세 정색을 하고 덤벼들어 분노를 퍼붓고 형사범 취급까지 하는 곳도 또한 한국이다. 이것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앞뒤가 안 맞는 처사다. 재미있는 사실은 같은 교수라 해도 미셀 푸코 같은 서구의 교수가 성에 대해 얘기한 것은 그 주장이 아무리 전위적이라고 해도 욕을 얻어먹기는커녕 오히려 숭배의 대상까지 된다는 점이다. 지독한 국수주의에다 지독한 사대주의까지 결합된 한국의 이상한 문화풍토는 어쨌든 두고두고 연구해봐야 할 테마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성에 대한 기득권 지식인 집단의 '결벽증을 가장하는 태도'나 '성 알레르기' 현상이 창의력의 억압과 비합리적 문화풍토 조성에 왜 그렇게 밀집하게 연관돼 있는지, 그 문제 또한 내겐 흥미롭기도 하고 짜증나기도 하는 수수께끼다. 권력이 겉으로는 성을 금기시하는 체하며 국민들을 훈도(訓導)해 나가려는 사회에서는 자연히 성과 관련된, 혹은 그런 분위기를 환기시킬 수 있는 단어들을 비속어화(卑俗語化)시킨다. 그리고 그런 범주의 담론이나 창작물에 대해 어쩐지 고상하지 못하고 천박한 것 같은, 심지어 죄스러운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만든다. 또한 성에 대해 무지하거나 관심이 없는 척하는 것이 마치 교양의 척도가 되는 것처럼 인식되게끔 은근한 압력을 가한다. 그런 사회일수록 지도층 문화인들은 스스로 완벽하게 도덕적이지도 못하면서 사회구성원들에게는 완벽하게 도덕적으로 살기를 강요한다. 그들이 강요하는 삶은 육체적이지 않고 정신적인, 즐겁지 않고 무미건조한, 솔직하지 못하고 내숭스러운, 개인주의적이지 않고 전체주의적인 삶이다. 어쩌면 이것은 기득권 지배 엘리트들이 이미 육체적으로 노쇠해 버렸거나 '품위의 꼭두각시'가 되어버려 젊음의 열정을 시샘한 끝에 강구해낸, 현진건의 단편소설『B사감과 러브레터』에 나오는 노처녀 'B사감'같은 심술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국민들을 획일적 통제에 길들여지도록 하기 위한 의도적 수단일 수도 있다. 성적 죄의식에 바탕을 둔 금욕주의적 인식이 국민 개개인의 마음 속에 자리잡을 때 거기서 반드시 '복종의 미덕'이 생겨나고, 아울러 '인내심의 함양'이 최고의 덕목으로 간주된다. 그래서 소수의 지배계층은 이성우월주의에 바탕한 '엘리트 독재'를 합법적으로 자행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개인적 쾌락의 추구'라는 시대적 대세는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쾌락'이란 말 자체가 무조건 부정적으로 인식되어서도 안 된다. 우리가 그토록 피땀 흘려 경제를 성장시킨 것도 따지고 보면 '쾌락'을 위한 것이 아니었던가. 동유럽이나 구소련이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것도, 결국 따지고 보면 개인의 실제적 쾌락을 억제하고 전체의 이데올로기적 쾌락만을 중시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이념 또는 이데올로기는 인간의 머릿속에 들어앉아 '고상하게' 육체를 지배할 수 없다. 그것은 가슴으로 배로, 또는 그 아래로 내려가 인간의 갖가지 관능적 쾌락의 주제가 되는 육체적 감각들과 통합돼가고 있다. 인류는 이제 중세기 1천년간의 암흑시대, 그리고 지금까지 계속 되고 있는 끊임없는 '종교(또는 이데올로기) 전쟁'들이,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는 다르게 갖고 있는 '정신적 가치에 대한 환상'에서 비롯된 추악한 부산물이라는 사실을 서서히 깨달아가고 있다. 그래서 문화적 선진국의 지성인들은 다가오는 21세기를 주도해 갈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몸의 철학'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성을 합리성이나 인권과 관련시켜 논의해야만 하는 사회는 문화적 촌티에서 미처 벗어나지 못한 사회이다. 그런 사회에서는 불합리한 억압과 자유권의 침해가 도처에 깔려 있기 때문에, 성에 대한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는 것이 자칫 사치스러운 넋두리로 몰릴 위험마저 있다. 이념이 팽배하고 군사독재문화의 척결과 민주화가 부르짖어지던 우리나라 80년대 시절, 이른바 진보적 지식인들조차 성을 '3S 정책'의 부산물 정도로 간주하여 천시했던 것은 그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성에 대한 표현의 자유나 성적 쾌락 추구의 자유가 보장될수록 민주적 사회 분위기와 개개인의 인권 역시 차츰 보장돼 간 것이 문화적 선진국들의 역사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새삼 상기할 필요가 있다. 물론 문화적 선진국에서 미국은 제외된다. 미국은 결벽증적 퓨리터니즘에 의한 위선적 이중문화가 발달한 나라이고 종교국가에서 미처 벗어나지 못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성범죄 발생률이 스웨덴의 3배라는 사실은 위선적 이중문화의 실태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우리나라는 조선조식 유교윤리에 미국식 청교도주의가 가세하여 더욱 더 이중적 성문화를 만들어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이제 성에 대한 죄의식과 편견의 제거가, 신통하게도 합리성의 회복과 인권 및 자유권의 신장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여야만 한다. 우리 사회 곳곳에는 광신적이고 비이성적인 구시대적 가치관의 잣대들이 너무도 깊숙이 뿌리내려 있다. 비단 사이비 종교나 점술의 난무뿐만이 아니라 편향된 도덕주의나 국수주의적 전체주의 그리고 수구적 봉건윤리 등에 나타나는 광신적 현상은, 다원주의를 인정하지 않고 개개인의 자유로운 생각을 억제하려는 데서 나온다. 참된 민주주의는 자유와 다원(多元)없이는 이룩될 수 없다. 그리고 당연한 인권으로 보장되는 '성적 자유'는 자유와 다원의 실현을 위한 촉매제가 되는 것이다. 이젠 성의 자유가 무조건 방종이나 범죄로 간주돼서는 안 된다. 그럼 이제 좀더 구체적으로 성 문제에 접근해 들어가 보기로 하자. 우선 우리 사회에서 성 문제가 거론될 때 늘 따라다니는 여러 가지 편견들에 대해 꼼꼼히 따져보는 게 좋을 것이다. 제일 먼저 지적하고 싶은 것은, 누구나 속으로는 성을 즐기고 싶어하면서도 겉으로만은 '성은 즐거운 것이 아니다'라는 태도를 보인다는 사실이다. 내가『즐거운 사라』라고 제목 붙일 때 '즐거운'이라는 말을 강조하여 쓴 것은 이러한 이중성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고 싶어서였다. 성은 즐거운 것이고 쾌락을 주는 것이라는 사실이 우리나라 지배 엘리트들 사이에서는 의외로 부정되고 있다. 아니 무조건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꼬리표가 붙어 부정되고 있다. 이를테면 '삽입 성교의 성만이 신성한 성이다', '생산을 위한 성만이 건강한 성이다'에서부터 심지어 '성은 즐겁긴 하지만 필요악이다'라는 말에 이르기까지 대다수의 점잖은 지식인들은 성이 무조건 즐거운 것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리고 정신적인 사랑이 성적인 사랑보다 훨씬 더 즐거운 것이라는 식의 논리로 성적 즐거움에다 은근한 압력을 가한다. 그러나 성 자체는 여하튼 즐거운 쾌락임에 틀림없고, 성적 즐거움을 추구하기 위한 다양한 성행동들 역시 그것이 강제적인 것이 아닌 한 선악이나 건강·불건강을 따질 수 없는 것이다. 특히 요즘에 와서는 '자식 생산을 위한 성' 보다 '쾌락을 위한 성'이 당연시돼 가고 있어, 결혼을 해도 종족 번식보다는 성적 즐거움에 더 비중을 두어 자식을 안 낳는 신세대 부부가 늘어가고 있고, 아예 결혼조차 안하고 독신으로 살며 성을 즐기겠다는 신세대 남녀들이 생겨나고 있다. 아주 특이한 체질을 가진 사람들 중에는 성을 억제하여 정신적 쾌락을 누리는 사람이 혹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제 적어도 마음속으로만은 성을 즐거운 쾌락으로 당당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즐거운 성' 자체가 표면적으로 은근히 부정되고 있는 까닭은, 성에 대한 개인적·사회적 억압이 아직도 우리 사회에 엄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에 대해 솔직히 말할 때 받게 되는 불이익에 대한 피해의식이 성적 위축을 가져와, 말하자면 포도를 따먹고는 싶은데 손이 미처 안 닿아 "저 포도는 분명 덜 익은 신 포도일 거야"라고 자위하는 '이솝우화'에 나오는 여우의 심리가, 한국인들, 특히 기득권 문화인들의 마음속을 지배하고 있다. 성은 갓난아기 때부터 늙어 죽을 때까지 우리를 따라다닌다. 성이라고 해서 꼭 삽입 성교만 의미하는 것을 아니다. 키스도 성이고 사교춤도 성이고 다양한 살갗 접촉도 성이고 구강성희(口腔性戱)도 성이고 관음취향(觀淫趣向)도 성이다. 갓난아기는 어머니의 젖을 빨아먹으면서 성적 즐거움을 맛보고, 노인은 젊은 아가씨의 미끈한 다리를 보기만 해도 성적 즐거움을 맛본다. 어떤 의사한테서 흥미로운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죽어가는 남자 노인 환자가 사망할 때가 됐는지 안됐는지 가장 확실하게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은 젊은 여자 간호사를 바라보는 환자의 눈빛이라고 했다. 젊은 여자를 보고서도 눈동자에 동요가 없는 노인은 곧 사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만큼이나 성은 늙어 죽을 때까지 우리를 따라다니는 것이고 직접으로든 간접으로든 충족돼야만 하는 것이다. 우정에도 권태가 있고 권력에도 권태가 있고 예술에도 권태가 있다. 그러나 성 자체에만은 권태가 없다. 그러나 문제는, 그토록 즐거운 성이 누구에게나 떳떳하게 충족되기는 어렵다는 사실이다. 성적 즐거움을 전혀 맛보지 못하는데 체면상 억지로 살아가는 부부도 있고, 갖가지 윤리의 장벽 때문에 성적 즐거움의 추구를 아예 포기하는 경우도 있다. 또 성생활을 하긴 하되, 죄의식을 느끼며 마지못해 의무적으로 하는 수도 있고, 또 특수한 취향(예컨대 동성애 같은)때문에 사람들의 눈총을 받아가며 찜찜한 마음으로 사랑을 나누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나는 지금까지 '성에는 변태가 없다' '모든 성애(性愛)에 불륜은 없다' 등의 화두를 가지고 여러 장르의 글을 집필했고, 특히 '상상적 대리배설'로서의 성적 즐거움의 획득을 위한 에로티시즘 예술의 효용을 강조한 바 있다. 변태가 있다면 남을 해치면서까지 성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만이 변태에 들어가고, 오럴 섹스나 자위행위, 동성애나 페티시즘(fetishism) 등 프로이드적 의미에서의 변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리고 윤리의 문제도 마찬가지여서, '모르는 게 약이다' 식의 성교육이나 성에 대한 과도한 규범이 오히려 일탈적인 성을 증가시킨다고 본다. 술을 금지하는 종교를 믿는 신자들 가운데 알코올 중독에 빠진 이들의 숫자가 술을 허락하는 종교를 믿는 신자들 중의 그것보다 훨씬 많다는 외국의 통계도 이를 입증한다. 또 이를테면 간통죄 같은 '이상한 법'을 폐지하면 불륜의 성은 훨씬 줄어들 것이고, 가식적 순결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나 모든 성행동에 대해 각자가 책임지는 '각자 선택'의 방식을 취하면 과도한 성윤리 때문에 생기는 반발적 일탈이나 성적 노이로제가 훨씬 줄어들게 될 것이다. 아무튼 성은 즐거운 것이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성적 쾌락에 매달려야 한다는 사실을 이젠 공식적으로 인정해야 한다. 그래서 '성 박멸운동' 비슷한 캠페인을 벌이는 결벽증적 정신주의자들이 오히려 이상성격자로 간주되는 사회 분위기가 이루어질 수 있을 때, 그때 비로소 성은 음지에서 양지로 올라와 인간의 생활을 보다 더 풍요롭고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 두 번째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을 위에서 말한 성과 윤리의 관계 문제에 대한 부연으로서, '성적 자유'와 '윤리적 타락'을 동일시하는 진부한 도덕관의 문제다. 한국의 지식인 사회에서 논리적 점검 없이 고질적으로 답습돼 온 것이 바로 '성적 자 유'를 '윤리적 타락'으로 규정해 버리는 편견이었다. 특히 관습적 윤리에 가장 자유로워야 할 문학인들조차 그런 편견에 젖어 있었다. 그들의 문학의 본질이 결국은 '금지된 것에의 도전'이고,『보봐리 부인』등 잘됐다는 연애소설들이 대부분 유부녀의 혼외정사 등을 다룬 것이라는 사실을 무시하고, 문학작품을 도덕 교과서로 보는 잘못을 저질러왔다. 그래서 이를테면 김동인의 소설『감자』나『김연실전(金姸實傳)』을 해석할 때 복녀나 연실이가 타고난 성적 능동성으로 인해 추구하게 되는 성적 자유를 '윤리적 타락'과 '내면의 황폐화'로 해석하는 게 보통이었다. 그러나 두 여인이 성적으로 자유롭게 된 것은, 가난이나 사회환경과는 별도로 그들이 성적 눈뜸의 과정을 남보다 더 빨리 겪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복녀는 가난이라는 기존의 억압적 환경을 타파하기 위해 순결 이데올로기라는 사회적 도덕률에 저항했던 것이고, 연실은 구한말의 고리타분한 남성중심 유교윤리에 저항하기 위한 일종의 시위행위로서 프리 섹스를 택한 것이었다. 나는 예전부터『감자』나 『김연실전』에 감명받아 이 시대의 복녀나 연실을 창조해내고 싶었다. 그래서 그 결과로 만들어진 것이 '사라'였는데, 사라의 자유로운 성의 추구는 결국 퇴폐적인 타락으로 단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설령 사라가 실제 인물이라 할지라도 그녀가 성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이상 법으로 처벌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사라는 허구 속의 인물로 나왔는데도 불구하고 형법으로 처벌받았다. 이러한 사실은 이 시대의 성관이 얼마나 위선적이고 비현실적인가를 보여주는 좋은 보기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만약에 '즐거운 사라'가 아니라 '즐거운 영수'였다면 자유로운 성 자체가 처벌받는 우스꽝스런 해프닝이 벌어지진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게도 된다.(영수는 남자 이름이고, 우리나라는 남자의 성적 방종만큼은 비교적 자유로운 사회가 아닌가.) 굳이 윤리적인 타락이라는 게 있다면 그것은 획일적인 잣대로 규정될 수 없는 것이고, 오로지 각자의 윤리관에 따라 갖가지로 다르게 정의될 수밖에 없는 문제다. 성을 바라보는 시각은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성 자체를 극도로 불결하게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성적 쾌락의 추구를 당연시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므로 어떤 행위가 '윤리적 타 락'에 해당하는 것인지 일정한 잣대로 가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애매모호한 의미로 쓰이면서 타인의 인권을 침해하거나 명예를 훼손시키는 단어가 바로 타락이라는 말이고, 거기에 버금가는 것이 음란·퇴폐·방종·외설·사치·향락 같은 말들이다. 도대체 어디까지가 방종이고 어디까지가 방종이 아닌지, 마찬가지로 어디까지가 음란이고 어디까지가 음란이 아닌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록카페에서 신나게 몸을 비벼대는 젊은 남녀만 봐도 그것을 방종이나 퇴폐적 향락으로 취급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나한테는 그런 풍경이 그저 '부러운 것'으로 다가올 뿐이다. 향락이란 단어 자체가 뜻하는 것은 우리말 사전에 의하면 즐거움을 누림이다.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어째서 죄가 된단 말인가? 그런 생각을 단지 개인의 견해로 갖고 있으면 모르겠으되, 자신의 편협한 잣대를 가지고 타인의 일거수 일투족까지 감시하고 검열하며 응징하려드는 도덕을 빙자한 테러리스트들을 나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 그들이야말로 진정 '부도덕한' 폭력주의자들이 아닐 수 없다. 세번째로 제기될 수 있는 문제는 '성적 표현은 아름다워야 한다'는 애매모호한 논리에 대한 의문이다 성은 즐거운 것이지만 매양 아름답게 표현될 수만은 없다. 보람있는 삶, 깨끗한 삶이 그토록 강조되는데도 신문 사회면에는 언제나 폭력·살인·절도·자살·부정부패 등이 연이어 보도되는 것처럼, 그리고 인간사회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는 소설에서 살인사건이나 폭력사건 등 일탈적인 삶이 소재가 될 수 있는 것처럼, 성에 대한 표현이나 실제의 성생활에 있어서도 성은 언제나 어두운 면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성 자체가 추해서가 아니라 성적 억압의 양상이나 성에 대한 위선적 규범 등이 추해서 생겨난다. 그런데도 유독 성에 대한 담론이나 창작 속에서만은 '아름다운 성'만을 얘기해야 한다는 주장이 허황하게 되풀이된다. 다른 것은 다 리얼하게 해부하고 찢어 발겨 표현해도 되지만, 아니 그럴수록 좋지만, 성만은 예외라는 식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표현된 성이 '아름다운 성'일까? 어떤 평론가의 황당한 얘기대로 '채털리 부인'의 성은 비록 불륜의 성이긴 해도 자연 속에서 나누는 성이기에 아름다운 성이 되고, '사라'의 성은 대도시의 '장미여관'에서 나누는 성이라서 불결한 성이 되는 것일까? 내가 보기에 성은 아름다운 것도 아니고 아름답지 않은 것도 아닌 그저 그런 것이다. 성은 미·추를 가릴 수 없는 다만 본능 영역이기 때문이다. 먹는데 어찌 미·추가 나뉘겠는 가. 귀족적인 레스토랑에서의 식사는 우아한 식사이고 민중적인 시장바닥에서의 식사는 더러운 식사가 아니듯이, 성에 있어서도 미·추의 구별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른바 로맨틱 러브를 아름다운 성이라고 보는 것이라면, 그런 정신편향적 사랑은 이미 심리학자들 사이에서 가식적이고 도착적인 사랑으로 치부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서 하는 말이 다. 만약 성에 있어 미·추가 있다면 그런 외모와 마찬가지로 제 눈에 안경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음습한 도덕적 편견을 걷어내고 인간의 자유권을 신장해갈수록 예전엔 더러워 보였던 것이 차츰 아름다운 것으로 대접받게 된 것이 바로 인류의 역사였다. 아니 아름답게 간주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적어도 더러워 보이지는 않게 된 것이 지성의 발달사였다. 그 대표적인 보기가 바로 '배설행위'라고 볼 수 있다. 그토록 휘황하게 아름다웠던 베르사유 궁전에 변소가 없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배설행위를 더럽고 거북한 행위로 보았기 때문에 당시의 귀부인들은 지독한 변비증에 걸려 고생했고, 어떻게 해서든지 똥을 안 누려고 발버둥쳤다. 그러다가 결국은 이제 변소 문화가 발달하여 화장실이 단지 배설행위를 하는 곳으로서가 아니라 귀중한 휴식공간으로 자리잡게 되었고, 먹는 문제보다 싸는 문제가 건강 유지에 있어 더 중요한 관심사로 대두되게 되었다. 그러므로 굳이 '아름다운 성'만을 고집하며 '더러운 성'을 억지로 가려내려 한다는 것은 성 자체를 불결하게 보고 있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그런 결벽주의자들은 누드화를 보고서도 더럽다고 말할 만한 사람들이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나라에선 성냥갑에 인쇄된 고야의 누드화 '벌거벗은 마야'가 불결하고 음란하다는 이유로 기소되어 대법원까지 가는 정식재판을 거쳐 유죄를 언도받은 일까지 있다. 성적으로 부정적인 자아상(自我像)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요즘 불결한 성으로 지적하고 있는 것은 대개 특수한 취향의 성, 이른바 '비생식적(非生殖的)'인 것들이거나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성'이다. 그들에겐 불 꺼놓고 더듬더듬 '슛 골인'하는 음침한 성만이 아름다운 성이고, 불 켜놓고 야단스럽게 핥고 빨며 벌이는 성의 유희는 불결한 성이다. 사라가 오럴 섹스를 좋아하고 땅콩을 가지고 자위행위를 했다고 해서 처벌받은 것은 정말 21세기를 바라보는 이 시대의 서글픈 코미디가 아닐 수 없다. 아름다운 성이 따로 없듯이 건강한 성 역시 따로 존재할 수 없다. 건강한 성이냐 불건강한 성이냐 하는 것은 각자의 견해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고, 두 사람이 합의하여 어떤 특별한 성행동을 하는데 제3자가 건강·불건강한 성을 가린다면 도덕적 죄의식에 과중하게 억압돼 있으면서도 본능을 못 참아 찜찜한 마음으로 벌이는 성행동이 진짜 불건강한 성이다. 그런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타인의 성에 관심이 많고 타인의 성행동을 감시·공격함으로써 스스로의 죄의식을 보상받으려 한다. 바로 서양 중세기의 성직자들 중 상당수가 비밀리에 행했던 성행동이 대표적인 보기라 할 수 있다. 그들은 많은 여자를 편력하면서도 한편으론 많은 여자들을 '마녀'로 몰아 화형에 처했다. 요컨대 성은 사생활의 영역이요, 개인의 영역이다. 이른바 정상 체위(영어로는 'missionary position' 이다. 직역하면 '선교사 체위'가 된다. 재미있지 않은가?)가 아닌 것을 법으로까지 다스렸던 초기 미국의 과도한 퓨리터니즘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성적 표현도 마찬가지다. 내가 어떤 소설이나 영화에 나오는 성을 추하고 불건강하게 봤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다 그렇게 봤으리라고 단정하거나 그렇게 보도록 강요하는 것은 이만저만한 월권행위가 아닐 수 없다. 더욱이 현실과 허구를 혼동하여 허구적 상상의 산물인 예술작품을 가지고 이러쿵 저러쿵 유·무죄 판별을 하려고 드는 것은 유치한 넌센스가 아닐 수 없다. 꿈 속에서 살인을 했다고 해서 꿈을 깨고 난 뒤 실제로 살인을 저지를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또 꿈 속의 행위를 어떻게 처벌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발상은 꿈을 꾸며 몽정을 한 것을 악마의 행위라 하여 처벌했던 암흑시대에나 가능한 얘기다. 성에 대한 자유로운 담론과 대리배설적 표현의 실현이 더욱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로 부각되는 것은, 부정적인 성의식이 한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를 망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서양 중세기의 암흑시대요 다음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이 나치 독일의 역사다. 둘 다 성에 대한 과도한 억압이 '화풀이 문화'와 '권위주의 문화'를 불러일으킨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세계 여러 민족 가운데 머리 좋기로 이름난 독일 국민들은, 어째서 히틀러를 자기네 지도자로 떠받들었던 것일까. 그리고 히틀러의 카리스마적 독재에 왜 그토록 열광했던 것일까. 히틀러는 군사쿠데타나 폭력혁명을 일으켜 권력을 잡은 인물이 아니다. 여론조작을 통했든 감언이설에 의했든, 어쨌든 그는 대다수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선거를 통해 정권을 장악했다. 많은 학자들이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서 접근한다. 우선 1차대전 후 패배감과 무력감에 시달릴 대로 시달린 독일 국민들에게 히틀러가 민족적 긍지를 심어주고, 또 경제발전을 위한 긍정적 대안을 어느 정도 제시했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다.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영웅적 카리스마로 백성 위에 군림하는 독재자는 언제나 난세에 출현하게 마련이다. 히틀러가 정권을 잡았던 때가 바로 그 '난세'의 정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혼란기라고 해서 무조건 카리스마적 독재자가 출현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독재정치를 은근히 그리워하는 국민들의 집단적 정서가 있어야만 비로소 독재자가 힘을 행사할 수 있다. 심리학자들은 이 점에 착안하여 히틀러의 집권 이유를 설명하려 한다. 그 가운데 가장 설득력있는 이론으로 정평을 받고 있는 것이 에리히 프롬과 빌헬름 라이히의 '권위주의적 성격' 이론이다. 프롬은『자유로부터의 도피』라는 책에서, 그리고 라이히는『파시즘의 대중심리』라는 책에서 이 이론을 전개시켰다. 이 이론의 골자는, 히틀러의 집권이 가능했던 것은 히틀러가 권위를 가진 인물이라서 그랬던 게 아니라, 당시의 독일 국민들이 권위주의적 성격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권위주의적 성격이란 한마디로 말해 사도마조히스틱(Sado-masochistic)한 성격을 말한다. 자기보다 강한 자에게는 절대 복종함으로써 마조히즘적 피학(被虐)의 쾌감을 얻고, 자기보다 약한 자에게는 가혹한 잔인성을 발휘함으로써 사디스틱한 가학(加虐)의 쾌감을 얻는 심리가 바로 사도마조히즘의 심리다. 권위주의적 성격을 가진 인간은 스스로 자유를 누리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홀로서기'를 도모해보지 못하고 언제나 독재적 보호자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마치 평생동안 아버지의 품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자식과도 같다. 폐쇄적 가부장제도가 힘을 떨치고 있는 나라의 국민들이나 성적 억압이 심하고 관념우월주의가 강한 나라의 국민들은 권위주의적 성격을 갖게 되기 쉽다. 나치즘 출현 당시의 독일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히틀러가 집권 후 에로틱한 내용의 서적들을 몽땅 불태워버렸다는 것이 한 증거다. 관념우월주의는 또한 극기주의나 금욕주의 또는 성 혐오증이나 성교 공포증 등과 통하는데, 히틀러가 철저한 채식주의자였고 성부전증 환자였다는 것도 그 역시 지독한 권위주의적 성격의 인간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히틀러는 국가와 민족을 섬기며 마조히스틱한 쾌감을 맛봤고, 국민들 위에 군림하여 그들을 기계처럼 부림으로써 사디스틱한 쾌감을 맛봤다. 독일 국민들은 히틀러를 섬기며 마조히스틱한 쾌감을 맛봤고, 유태인들을 학대하면서 사디스틱한 쾌감을 맛봤다. 권위주의적 성격은 곧바로 관료주의적 성격과 통한다. 윗사람에겐 약하고 아랫사람에겐 강한 것이 바로 관료주의적 성격인데, 이는 개성 없고 야심만 많은 출세주의자들이 흔히 갖고 있는 성격이다. 그들은 주체적 자아가 없기 때문에 지위에 의해서만 스스로의 정체성(正體性:Identity)을 확인 받으려 한다. 그리고 높은 지위에 올라가는 가장 효과 빠른 수단이 '보스에 대한 아첨과 절대충성'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한국처럼 권위주의가 만연해 있는 나라도 달리 없을 것이다. 수구적 봉건윤리가 여전히 판치고 있기 때문에 민주화나 자유화가 아무리 소리 높여 외쳐져도 권위주의는 사라질 줄을 모른다. 예전엔 단순히 군사독재가 권위주의적 사회 분위기를 만드는 원흉이라고 생각하여 그 해결책의 제시도 쉬웠다. 그러나 외형상 군사독재 문화가 사라진 지금, 권위주의 문화를 없앨 수 있는 뾰족한 처방은 나오지 않고 있다. 그저 '도덕성 회복'이니 '의식개혁'이니 하는 투의 막연한 처방만 제시되고 있을 뿐이다. 이럴 경우 우리는 다시 한번 성에 대한 이중시각(二重視角)에 바탕을 둔 금욕주의적 봉건윤리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 '강력한 아버지'의 관념에만 의지하려고 하는 정신편향의 봉건윤리는 자아상실이나 정신분열을 일으키고 성적 억압에 따른 '화풀이 문화'를 가져온다. 화풀이 문화는 성욕을 권력욕으로 대체시킨 데 따른 부작용의 산물이다. 국민 각자 각자가 권위주의적 성격에서 벗어나 '야(野)한 자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질 수 있을 때, 그때 비로소 권위주의 문화에 따른 상명하복과 복지부동 풍조의 만연, 그리고 개성과 창의성을 억누르는 풍조가 사라져 우리나라는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성문제를 얘기하자면 청소년 문제와 이른바 신세대 문화 얘기를 안할 수 없다. '사라'가 처벌받은 것도 따지고 보면 청소년 문제를 핑계삼은 것이었고, 새시대에 맞는 성윤리와 개성 있는 다원주의 문화의 가능성을 다소 낙관적으로 예견해 볼 수 있게 하는 것도 신세대 문화의 급속한 대두가 피부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우선 신세대 문화는 청소년 문화에 다름 아니고, 신세대 문화의 대두는 그들을 오랫동안 괴롭혀온 금지적 규범에 대한 반발의 결과라는 사실을 확실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지금 우리나라 청소년들은 이것도 하지 말라, 저것도 하지 말라는 성인들의 금지적 규범 때문에 숨통이 꽉 막힌 상태여서 몸부림치고 있다. 가난했던 조선조 시절에도 이도령과 춘향이가 15세 나이에 연애도 하고 질탕한 성희까지 벌이는 등 성인 대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경제 성장으로 인해 발육이 빨라진 요즘의 청소년들은 자유로운 멋내기나 놀이 공간의 확보 등 성적 대리배설의 수단조차 전혀 허용되지 않고 있다. 또 성 자체에 대한 알 권리조차 박탈당하고 있는 형편이고 보니, 그들이 격심하게 갈등하며 반발할 것은 뻔한 이치다. 그런데도 어른들이 제시하는 청소년 훈육용 카드는 기껏해야『명심보감』식의 구태의연한 훈계요, 거기다 한술 더 떠 '너 죽고 나 살자' 식의 입신출세를 효도의 근본으로 보는 봉건시대의 유교적 교육철학이 강요된다. 이런 형편이고 보니 지배 엘리트로 출세하려는 극소수의 '독종'을 뺀 나머지 신세대 청소년들은 억울한 열패감(劣敗感)과 막연한 반발심리의 늪에서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다. 해마다 수백명의 청소년들이 억압적 성인문화에 항거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다. 이 비참한 현실을 만들어놓은 책임은 전적으로 어른들에게 있다. '하지 말라'는 규범밖에 모르는 시대적 적합성을 상실한 어른들의 그릇된 가치관과 의식구조, 그리고 비민주적 사고방식이 신세대 청소년들의 숨통을 죄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신세대 문화는 봉건적 정신주의 문화에 대항하는 '육체주의 문화'에 다름 아니 다. 거기에 덧붙여 소아병적 민족중심주의 문화에 편견에 반발하는 '탐미주의 문화', 그리고 집단적 전체주의 문화에 반발하는 '비이기적 개인주의 문화'가 신세대 문화의 내용을 이룬다. 그중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역시 '육체주의 문화'다. 육체주의란 정치적 이데올로기나 종교·윤리·철학 등의 이념적 명분을 위한 투쟁보다 육체적 안락이나 실익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치관을 가리키는 것인데, 한마디로 말해 평화주의에 바탕한 '실용적 쾌락주의'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성관이나 결혼관을 놓고 볼 때 신세대 문화는 각자 선택의 방식을 지향한다. 순결 이데올로기를 악착같이 고수한다고 해서 윤리적인 사람으로 간주되는 것도 아니고, 그 반대로 촌스러운 사람으로 간주되는 것도 아니다. 마찬가지고 프리 섹스를 실천한다고 해서 타락한 사람으로 취급되는 것도 아니고, 그 반대로 세련된 멋쟁이로 간주되는 것도 아니다. 성적 취향 역시 마찬가지. 그들에겐 동성애까지도 자연스런 사랑의 패턴으로 간주된다. 결혼관 역시 그래서 결혼이든 간주된다. 결혼관 역시 그래서 결혼이든 동거든 각자가 알아서 하고 안 하는 것이지 일정한 규준이 있는 게 아니다. 자식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결혼을 해도 자식을 안 가질 수 있고 결혼을 안 하더라도 '당당한 미혼모'로 아기 기르는 기쁨을 맛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고등학교 고학년이나 대학 초년생 정도의 청소년들 사이에서의 얘기고, 문제는 중학생 정도 아이의 청소년들에게 있다. 여자 중학생이 자꾸 헛배가 불러 내과 병원에 치료를 받으러 갔다가 임신진단을 받는 일이 생길 정도로, 그네들은 여전히 무지와 암중모색 상태에 있다. 이럴 경우 "아는 것이 힘이다"를 적용하여 성에 관한 정보를 학습시켜야 하고, "하던 짓도 멍석 깔아주니까 안 한다"는 속담을 적용시켜 보다 적극적인 성교육과 대리배설 수단을 마련해줘야 한다. 요컨대 '강간보다는 프리 섹스가 낫고, 낙태보다는 적극적인 피임이 바람직하다'는 식의 보다 개방적인 토론 풍토의 확립이 필요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본능적 쾌락욕구의 정당성을 인식시키는 일이 중요한데, 그 까닭은 쓸데없는 죄의식은 죄를 저지르게 될까봐 두려워하는 기대불안 심리를 낳고, 기대불안 심리를 곧바로 진짜 성범죄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또한 성적 표현물에 대한 무조건적 차단으로 호기심을 부추기기보다는 차라리 자연스런 접촉을 허락함으로써 '시큰둥하게 하기'의 면역효과를 노리는 것이 더 낫다고 본다. 이 땅의 칙칙한 성문화를 상징하듯 '슬픈 사라'가 돼버린 '사라'가 다시금 '즐거운 사라', 아니 '밝고 솔직하고 합리적인 성문화'로 거듭나기를, 또한 하루 속히 해금되어 누구나 자유롭게 읽을 수 있는 있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으로 나는 이 글을 쓴다. [마광수] *Click here for FREE screensavers/wallpap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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