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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 성관계는 뺏고 뺏기는 관계가 아니다. 육체접촉에는 성관계뿐만 아니라 손잡기, 포옹, 페팅에 이르기 까지 여러 가지와 여러 단계가 있다. 그런데 육체접촉의 '상징'이랄 수 잇는 것은 역시 성관계, 즉 성교가 아닌가 싶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손잡기는 포옹이 주는 의미보다 훨씬 복잡하고 강하기 때문일 것이다. P양은 남자친구와 교외에 데이트를 나갔다가 귀가길이 늦어져서 그와 여관에서 밤을 보내게 되었고, 그날 '순결을 빼앗겼다'라고 한다. 이런 일은 젊은 남녀간에 흔히 발생하는 첫 성관계의 양상이다. 그런데 내가 여기서 문제시하는 점은 '순결을 빼앗겼다'라는 표현이다. 그날 밤 P양의 남자친구는 P양을 잘 '꼬셔서' 성관계를 가지고자 많은 노력을 했을 것이고 P양은 마지못해서 몸을 허락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때 P양이 마지못해 몸을 허락했든, 오히려 반대로 적극적으로 성을 요구했든 관계없이 그날의 관계가 명백히 강간이 아니었다면 '순결을 빼앗겼다'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 이유는 그런 표현과 생각이 P양 자신에게도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여성의 순결, 혹은 미혼녀의 처녀성은 오래전부터 강조되어 왔다.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옳다 그르다를 떠나서 순결이나 처녀성이 결여되었을 경우 여성 당사자가 당하는 불이익을 생각해 볼 때, 그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중요해 보인다. 그러나 나는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다. 순결이나 처녀성은 명백히 강간이 아닌 한 남자가 빼앗아가는 것이 아니다. 성관계에 관해서 보든 적극성을 남자에게 부여하고 그 책임 또한 모두 남자에게 돌려버리는 것은 여성 스스로 여성을 약자로 만드는 행위이다. 성관계는 무엇을 뺏고 뺏기는 관계가 아니다. 그런데 우리의 언어에는 그런 뉘앙스를 풍기는 말들이 많다. 순결을 빼앗긴다는 말을 비롯해서, 남자들이 주로 사용하는 말로 '먹는다' '따먹는다'라는 말에도 그런 의미가 섞여 있다. 상관계에서 남자는 적극적이고 강자의 입장이며 여자는 수동적이고 약자, 즉 '먹히는' 입장임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다. 우리는 이런 왜곡된 언어표현에 의해서 자기도 모르게 영향받고 있다. 성관계에 대한 왜곡된 표현으로서 '정복'이라는 말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여자가 남자를 정복하는 경우도 있지만 드문 것 같고, 대개는 남자가 여자를 정복한다고 표현한다. 우리가 남녀평등을 지향한다고 하면서 이런 불평등적인, 왜곡된 언어를 계속 사용해야 할까? 남자친구의 꼬임과 요구에 넘어가서 여관에서 몸을 합한 것을 두고 순결 빼앗김이라고 자기 파괴적인 말을 계속해야 할까? 남녀평등은 법률적인 평등뿐만 아니라, 이런 성관계와 관련된 언어를 제대로 사용하는 것에서도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김계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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