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re articles by Leonid A. Petrov
1.
역사적 연구와 극단적
민족주의
2.
1960년대 북한 역사서술
3.
주체적
역사
서술의
생성
4.
주체역사관과
한반도
통일
1968년, 맑스주의 변증법의 몇몇 요소와 역사적 물질주의가 민족주의적 원칙인 주체사상과 서로 긴밀히 얽혀 있다는 내용의 민족 역사 연구의 새로운 접근법이 북한에서 고안되고 공표되었다. 새로운 접근법에 있어 결정적인 역할은 모스크바에서 교육받은 철학자이자 역사가인 황장엽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는 원시적과 공산주의적 생산양식은 계층과 계급이 없는 사회에 기초한다고 가정하고, 역사적인 과정의 초석으로서 계급투쟁의 정통 맑스주의를 비판적으로 수정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가정은 “계급”의 관점으로서가 아닌 “역사의 주체인 인민”의 관점에서 비추어야 할 역사였다.
북한 역사학자들이 1967-1968년의 역사서술의 위기로부터 회복되는 데에 10년이 걸렸고, 마침 “조선전사”(1979-1982)가 북한에서 민족 역사의 주체사상적 접근의 모델로 생기게 되었다. 이 책의33권중에서18권이 김일성과 그의 가족, 반일 사회주의 국가건설 활동역사에 바쳐졌다. 한국역사를 신석기 시대에서 대한제국의 멸망까지 다룬 또 다른 15권은 민족역사의 모든 부분을 찬미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한국의 찬란한 과거를 복원하는 과정을 통하여 북한의 역사학자들이 내렸던 결론들은 지금 현대 남한에서 매우 유행하게 되었다. 이 논문은 역사에 대한 극단적 민족주의적 접근의 계보를 검토하고, 한국의 통일과정에 수단으로 쓰이고자 한다.
그리고
이
논문은
북한에서
주체주의의
역사서술의
확립을
분석하고
이
연구의
결과와
남한
역사학술에서
부활하는
민족통일주의와
비교하기
위함이다.
기간별
북한
역사문학을
자세히
관찰함으로써
초창기
역사와
맑스-레닌주의(후에
주체사상으로
바뀜)
공식적인
역사서술과
사이에
존재하는
수많은
모순점을
발견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아래
사용된
자료는
남북한
역사학자들의
글과
주체사상을
창안한
황장엽의
회고록,
저명한
소련
역사학자
Mikhail N. Pak 과
Yurii M. Ryurikov (류학구)의
회고록들이
사용되었다.
또한
여러
동료들,
특히
제임스
류이스
(James B. Lewis)교수와
이
연구를
위해
후원한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
(The Academy of Korean Studies)
특별한
감사를
표한다.
1.
역사적
연구와
극단적
민족주의
학자의
삶,
특히
과학분야에
잘못된
자료를
날조하거나
부정
연구의
결과를
발표하는
것은
수치스럽고
적절하지
못하다.
만물의
법칙은
불가피하게도
부정의
정체를
드러내도록
되어있다.
특히
학문분야로서의
역사는
항상
정치와
동반되어
있어
학자들을
방해하는
특별한
유혹을
동반한다.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은
현대
역사학자들이
하는
왜곡이나
실수에
대해
반대증언을
할
수가
없다.
이러한
장애물은
역사적
자료의
빈약함에서
발생하며,
후원자의
강력한
이해관계에
대한
압력이
대개는
너무
강해서
학자들로
하여금
발견을
위조하도록
간절히
원하게
한다.
정치적인
배려나
연구비
상황이
위태로워지면
학자들은
입지가
불확실하게
되며,
대개는
활용
가능한
사실들에
근거한
민첩한
결론을
내리거나,
미리
내린
결론을
정당화하기
위한
방법으로
해석하는
상황의
두
갈래
길의
선택에
놓이게
된다.
대중을
흡족하게
할
필요가
있을
경우,
연구자들이
사실을
위조할
준비가
되어있는
경우는
허다하다.
1928년
유명한
문화인류학자
마가래트
메아드
(Margaret Mead)에
의해
쓰여진
책
“Coming
of Age in Samoa”(Mead, 1928년)는
수년간
이루어진
남태평양인들에
대한
연구
중
가장
최초의
연구로
간주된다.
그러나
후에
그녀가
연구한
발견내용들의
대부분은
원래부터
만들어진
것이고
거짓말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Mead는
강력한
학자출신의
정치인이였다.
실제로
이
책이
출판된
후
몇10년이
지난
후에만
사실이
밝혀졌고
그녀가
불명예스러워지지도
않았다.
Mead의
책은
오히려
문화적으로
열등한
비유럽
민족의
신사회
다윈(Darwin)주의적
사고에
부합하는
인종적
전형을
조장했기
때문에
칭송
받았다
(Freeman,
1983년).
부패한
학자
고결성의
또
다른
예는
지금
일본에서
크게
논란이
되고
있다.
2003년
5월
24일,
일본
고고학
연합의
특별
연구반은
아홉개
도(都)에서
162개
유적지를
믿지
못
할
사실로
규정하였고,
이와
관련하여
고고학자
후지무라
시니치
(Fujimura Shinichi)의
연구가
불명예스럽게
되었다.
사립
도호쿠
구석기
연구소의
전
부원장
후지무라는
츠끼다테조에
있는
가미타가모리
유적지에서
유물이
발굴되었다고
밝혔다.
그
유적지는70만년
전까지
정착하고
거주했던
것으로
믿어져
왔으며,
구석기시대의
초기나
중기로
추적된다.
그러나
미야기도
정부
관할청에서
열린
충격적인
언론
컨퍼런스에서
후지무라는
그가
소장하고
있던61개의
석기
조각들을
묻었다고
밝혔다(2000년
11월
6일,
요미우리
신문).
그
석기는
60만년
된
것으로
알려졌고
미야기도
내의
다른
곳에서
발굴되었다.
후지무라는
동료들로
부터
발견을
해내라는
극도
압력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발견을
위조하였다고
밝히고
사죄하였다(아사히
신문,
2000년
11월
6일).
그가
참여한
발굴
작업
때마다
발견을
이루어낸
기록들은
동료로
하여금
“신의
손”이라고
감탄하게
만들었다.
후지무라의
발견은
일본
구석기
시대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고
어떤
전문가는
그의
발견들은
“고고학
역사를
바꾸어
놓았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발견
때마다
신문의
앞면을
장식했으며,
이로
인해
일반
일본
고고학자들을
위한
기금이
마련되기도
하였다.
세계
역사가
일본과
함께
인류의
발생부터
새로이
쓰여질
순간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민족적
자긍심을
올리는
그러한
재미와
흥미있는
역사를
믿고싶었을
때
어떤
누구도
제동을
걸고싶지
않았다
(Japan
Today, 2003년
5월
26일).
만약 그러한 의도적인 위조가
“자유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었다면, 철의
장막 뒤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실 변경의 규모를 누구나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역사적 사실의 재구조화는 북한의 역사편찬에서 광범위하게 수용되었고 민족의 과거가 빠르게 변화하는 이데올로기적 정세에 맞추어 지도록 시도되었다. 1956년과 1967년
사이에 북한에서 역사학술의 발전은 민족주의적 원칙인 주체사상을 기반으로 한 완전히 새로운 전통이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들의 민족주의적 염원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북한의 통치자들은 한국 역사의 초창기 사건들을 더 오랜 고대시대의 사건이라 주장하였다. 동시에, 북한 역사학자들은 북방 왕국들의 “전통적 우월성”을 강조하고 남방 이웃의 역사적 열등성을 증거하도록 요구되었다. 그러한 태도는 주체사상 형식의 공산주의 깃발 아래 한 나라를 통일하는 북한 정권의 정당성을 증명하는 데에 필수적이었다.
계급투쟁에
고무되어 변경할 수 없는 과정으로써 역사를 설명하는 것과 사회진보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감으로써, 북한 역사학자들은 어떤 맑스주의의 역사적 단계도 그들 자국의 역사와 일치한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므로
민족 역사는
원시적인 공동의
사회에서 노예소유,
봉건주의
그리고 자본주의에서
한국스타일의 사회주의의
승리로 엄연히
이끌어 가는
사회-경제
형성과정에 있어서
주체적인 변동의
순서적인 연속체가
되었다. 그것은
한국문화가 이웃
국가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강조된 반면,
외세의
어떤 유입도
허용될 수
없다.
많은
남한역사학자들도
마찬가지로
한국
민족의
발상지는
만주벌판이라고
주장한다.
새로운
역사잡지인
“역사탐험”
창간호(월간중앙
6월호
별책부록)는
서울대
신용하
명예
교수와의
인터뷰로
시작된다.
그는
구조선
역사에
관한
그의
발견은
세계
역사를
완전히
뒤바꾸는
것이라
주장한다.
그
함축은
또다시
한반도와
만주가
인류문명의
시원지이며,
이
최초
문화의
흔적은
터키,
프랑스와
핀란드까지
에서도
발견된다(신용하,
2003:6-9).
한국
민족의
진정한
발원지는
시베리아의
바이칼
호수(Lake
Baikal)가라는
또
다른
가정들도
많다.
“역사탐험”지의
같은
6월호에서
김종록은
바이칼이
시베리아인
샤머니즘의
시원지이고
주민들도
현대의
한국인과
유사하다고
밝혔다.
그러므로
한국
민족의
기원에
대해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문화는
분명
동쪽으로
움직이는
것인데,
바이칼에서
만주로
한국으로
마침내
일본으로
움직였던
것이다(김종록,
2003:36-46). 즉,
(일본뿐만
아니라)
남한과
북한의
민족의
기원
정착에
관한
역사적인
연구에서
강력한
유사점을
볼
수
있는데,
그러한
기원을
고대를
찬란한
것으로
나타내려
시도한다.
의심이
가고
허구성이
보이더라도
활용
가능한
역사적인
사실이
있다면
매우
유용하게
쓰인다.
고대
한국의
영토가
인류
문명의
시원지였다는
주장은
점점
북한과
남한에서
공통적으로
들을
수
있으며
이를
뒷받침하는
어떠한
자료도
환영
받는다.
2.
1960년대
북한
역사서술
역사를 계급투쟁
중심으로 보는
맑스-레닌주의
또는 국제공산주의전통의 역사관에서
역사를 주체사상
또는 지도자
중심으로 보는
민족주의적 역사서술로의
급격한 전환은
북한에서 학술
발전의 과정에
영향을 미쳤다.
조선
노동당 중앙
위원회는
사라져가고
있는 다양한
학문적인 의견들
중에서 하나를
공식적인 가설로
선택하고자 한다.
모든
다른 관점은
반당 반혁명으로
금지하고 그
저자들이 생존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역사적인
글에 남아있는
상식은 점차
무기력하게 되었으며,
학술적인
부정에 대한
연쇄반응은 북한
역사 학술을
마침내 1960년
암흑의 시대로
몰아넣는다.
이데올로기적 과정이
형식적으로는 국제공산주의자
맑스-레닌주의에
여전히 남아있지만
1960년대부터
북한 역사학계가
체계적으로 주체사상의
영향에 노출되기
시작하였다. 민족역사에
대한 “합법칙성”을
적용하기 위한
방법을 위한
이전 연구가
독특한 민족적
특성의 허식으로
대체되었다. 북한의
역사적인 주기는
민족 역사를
민족주의적 원칙과
주체의식에 따라
구성하기 위해
급격히 새로
쓰기 시작하였다.
한반도가
외세에 의해
점령당했던 한치의
의심도 피하기
위해서 모든
중국에 의해
만들어진 증거나
문화유물들이 북한영토에서
발견되기라도 하면
“가짜”
또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로
여겨진다(김석형,
1963:5-6 9월
20일).
더욱이
강력한
민족주의와 일제
식민
역사에
대해
보복하기
위하여
일본
영토에
한국령의 땅이
있다는
새로운
가설이
생성되었다(김석형,1963년).
이
논리에
따르면
고조선의
옛
수도이자
평양의
전신인
왕검성의
연구는
한국이
아닌
중국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1963년과
1965년
사이에
북한의
고고학자들은 중국의
학자들과의
협력아래 기원전8세기나
7세기로
추정되는
강샹과 로우샹 무덤이 랴오둥 반도에서
발견되었다.
그
결론은
수도였던
왕검성이 그
쪽에
위치해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비파
모양의
청동
단검)
유물들이
2개의
중국
무덤에서
발견되었고, 그
시기들이
대략
같았으며
한국의
북쪽에
있는
미송리와
묵방리
유적지에서 발견된
같은
물품을
소지하고
있었다.
(Lee Ki-dong, 1992: 27-28).
제국의
위대함에
대한
열정이
북한
학자들로
하여금
고조선과
그의
신화적인
창시자
단군
역사에
관한
논의를
계속하도록
이끌었다.
1950년도
후반
북경에서
중국
고전을
공부한
역사학자
이지린은
이
논의를
폈다.
‘고조선에
관한
연구’라는
그의
책에서
이
전설적인
국가가
기원전5세기
또는
4세기에
설립되었다고
추정하였다
(이지린,
1963년).
그
당시,
북한
역사학자들은
여전히
단군신화에
관한
어떤
역사적인
타당성을
부정하였고
그것을
단지
원시적인
토템이즘
(Totemism) 의
산물로
다루었다.
예를
들어,
이상호는
그
이야기가
단지
“사회경제적인
면에서
몇
가지
중요한
변화를
반영한
인기있는
전설”이었다고
단언하였다
(이상호,
1963년).
김일성의
장남인
김정일과
그의
숙부
김영주
사이에
이루어진
위대한
지도자의
공식적인
계승자로서의
역할을
위한
열광적인
투쟁에서,
김정일이
우위를
차지하였고
곧
학문에서의
구루(guru)로
칭송되었다.
전해진
바에
의하면,
4년간의
대학
교육기간
중에
젊었던
그에
의해
쓰여진
1,400개의
기사와
수필
중에
6개는
민족
역사의
발행물로
기증되었다(이성철과의
인터뷰,
1999년).
이
초기
작업의
하나인“삼국통일
문제를
다시
검토
할대에
대하여”(1960년)에서
그는
남쪽
왕국
신라는
국가를
통일한
적이
전혀
없다고
주장한다.
7세기
신라는
전
삼국
영토의
3분의
2만이
법치
아래에
통합하여
나라를
다스렸다(김정일,
1960년
10월
29일).
김정일의
신라에
대한
선입견은
분명히
신라의
민족주의와
애국주의의
부재에
대한
반응으로
나타났다.
한반도를
지배하려는
분투가
이어지는
동안
신라는
이웃의
백제와
고구려를
압도하기
위해서
중국
당의
군사의
힘을
간청하였다.
또
다른
연구“고구려를
비롯한
삼국사회경제적
성격을
옳게
해명할대에
대하여”(1960)
에서
청년
김정일은
“옛날”
맑스-레닌주의
역사학자들을
독단주의로
비판하였으며,
만약
백제와
신라를
비교한다면
고구려가
사회
경제적
발달에서
더
높은
지위를
자랑하였다고
논박한다
(김정일,
1960년
10월
18일,
김정일,
1960년
11월
10일).
1963년
김정일은
한국에서
구석기시대
문화의
발견에
환호를
보냈다
(김정일,
1963년
5월3일).
그리고
1964년에
그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대로
고구려는
기원전
37년에
설립된
것이
아니라
기원전
277년에
설립되었다고
발표하였다(김정일,
1964년
2월
10일,
1964년
9월
16일).
이러한
주장은
북한
지도성이
남한으로
하여금
국가를
통일하는
역사적인
정당성의
여지를
주지
않기
위해서는
필수불가결
하였던
것이다.
십대였던
김정일이
역사
서술적
경험이
전혀
없다는
것은
자명하며,
누가
그의
배후에
있었는지는
아직도
분명치
않다.
이러한
초기
연구업적은
최근에
김정일
저작집들에
어디에도
포함되지
않았다.
그가
개입함으로써
역사적인
학술에
대혼란을
가져왔음은
자명하며
대
재편성을
하게끔
만들었다.
1960년대
중반까지는
김일성
일가가
이끄는
추천에
따라
수정되고
교정되지
않은
한국역사에
대한
주제는
없었다.
일제
식민지
기간동안
좌익
민족주의적
역사서술이
발달함에
따라
한국
맑스주의
역사가의
기여는
부정되었고
“옛날”사회
경제적사학은
아예
언급되지도
않았다.
철학,
역사학과
경제학의
저명한
학자들은
주체사상에
대한
충성을
표해야만
했다.
서둘러
그렇게
이행하지
않은
이들은
이데올로기적
분야에
있어서
절대적인
지배의
추구하는
김일성에게
장애물을
형성하였다.
그러한
환경에서
북한의
학자들의
손에
놓인
역사적
사실들은
신화적
담론들의
정치화된
재조작
하는
역할을
하기
시작하였다.
이
역사적인
해설에
동요하는
단순함은
전
반일
게릴라로
하여금
사상을
통제하고
정치적인
의견차이를
첫
징후를
탐색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1967년
이후
모든
역사서술학적
논쟁은
종료되었고
전문
정기
간행물들의
출판은
중단
되었고
학자들은
순종적인
관료주의자들의
의무만
이행하도록
되었다.
3. 주체적 역사
서술의
생성
북한의
주체사상
이론가들은
북한에서
이
이데올로기의
출현이
우연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한국의
역사가
주체사상이라는
특이한
사상이
명료화
될
수
있는
객관적인
역사적
상황과
주관적인
인간의
상황의
합법적인
기반을
제공해왔다.
이
두
상황이
동시에
나타날
때만이
그들은
충분하게
될
것이다(Park,
Han S. 2002:17). 그러나
독특한
학문적
현상으로서의
주체적
역사적
서술의
출현은
다만
북한의
통치자들이
대중에게
민족의
과거사를
“올바른”
지각으로
주입하는
데에
실질적인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1967년
5월
25일,
김일성은
국가에
새로운
10개요
정치적
프로그램을
발표하였고,
그10개요
프로그램은1936년
5월에
조국광복회의
10개요
프로그램과
비스탄
것이였다.
학문적
분야에
연결되는
주요한
전략들은
과학과
기술의
발전,
사회주의적
문화의
건설과
또한
조선
노동당과
노동계급의
지도력
아래
농민과
지식계급을
포함한
사회
모든
구성원의
“혁명화”와
“프롤레타리아화”와
같이
모든
측면의
삶에
주체사상을
세우는
것이다
(Scalapino와
Lee, 1972: 612-613). 이러한
점에
비추어
볼
때,
역사를
기술하는
학자
정치인들의
압력은
거대해졌다.
그가
남한으로
탈출한
후
쓰여진
책
“나는
역사의
진리을
보았다”(1999)에서
황장엽은
1960년
후반의
주체사상
형식
역사서술이
생성,
구체화된
상황을
밝혔다.
그
당시
황장엽은
평양
김일성종합대학의
총장이었으며,
조선노동당의
중앙위원회의
후보
회원이었다.
김일성대학의
2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발간된
연구
논문의
모음집에
기재하기
위해
쓴
그의
논설
“사회발전의
동력”(1966)에서,
그는
사회개발의
과정에서
의도하지
않게
지식층의
역할을
과도하게
강조하였다.
학계로부터는
일반적으로
긍정적인
반응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이
글이
그에게
심각한
문제를
야기시켰으며
그의
학자로서의
생애를
거의
마감하게
하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그는
김일성과
북한
부수상
김일로부터
“이론적인
실수를
이론적인
수단으로
수정”하도록
지시받았다(황장엽
1999: 150). 황장엽은
원시적과
공산주의적
생산양식은
계층과
계급이
없는
사회에
기초한다고
가정하고,
계급
투쟁이
역사과정의
주춧돌로
보는
정통
맑스주의
역사관를
비판적으로
수정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결론은
역사는
“인민”들의
관점에서
보여져야지
계급으로서
보여져서는
안된다
였다.
이
사상을
지지하기
위하여,
황장엽은
스탈린의
보복(1937-1938)과
마오쩌뚱식
문화대혁명(1966-1969)의
예를
제공하였다.
이
두
가지
경우
프롤레탈리아의
독재의
설립을
위한
투쟁의
구실로
모든
범죄와
부정
행위들이
자행되었다.
황장엽의
가설에
따르면,
북한의
새로운
이데올로기는
계급
투쟁의
고전적
맑스주의
개념도
스탈린에
대한것도
한
계급
독재의
마오쩌뚱식
개념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중심”
사상에
달려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역사연구는
민족의
과거사의
이슈를
인간의
발달과
창조성의
관점으로
부터만이
서술되어야
한다
(리성철
교수과의
인터뷰,
1999).
물론
황장엽의
이론적인
공식은
북한
공산주의
통치자들의
진정한
의도
만큼
현혹만
시키는
작전뿐이였다.
김일성과
그의
일가는
단순히
역사를
계급투쟁
중심으로
보는
국제공산주의
맑스-레닌주의
이데올로기에
강력한
국수주의적
대안이
필요했던
것이다.
중국-소련
갈등의
최고점에서
그러한
관점이
북한으로
하여금
“큰형들”의
싸움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하였다.
황장엽은
올바르게
김일성
도당이
주된
강조점이
민족에
주어지도록
하는
역사의
이론을
가지고
싶어했다는
것을
올바르게
인식하였다.
더불어,
“자신의
운명의
주인으로서의
인간”의
이미지에
의해
모호성이
생성되었고,
이는
김일성의
독재적
통치로부터
떠오르는
어려운
질문들에
완벽한
해결점을
제공하였다.
그러므로,
북한의
민족
역사연구의
새로운
접근이
고안되었고,
이는
맑스주의
변증법과
역사적
물질주의의
몇몇
요소가
주체사상
원칙과
긴밀하게
얽혀있었다.
그때부터
민족주의적,
지도자
중심의
역사적
전통은
북한의
공식적인
역사과이
되였고
“인간은
만물의
중심”이라는
문구도
거의
진부한
표현이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사회주의와
자기
주창한
맑스주의
이데올로기로서의
주체사상은
역사의
이끄는
힘으로서의
물질주의에
도전한다.
유교사상과
같이
주체사상은
맑스-레닌주의의
물질적
결정론을
거부한다.
두
가지
설에
의하면,
인간행동은
양식과
생산의
관계의
조건에
의해
이끌어지는
것이
아니라
“뇌수”의
직접적
인도에
의해
이끌어진다(Park,
Han S.,
2002:34,64). 모든
“상부구조”(superstructure)가
근간이
될
“하부구조”(substructure)
로서의
경제적
물질적
구조의
맑스적
전제는
절대적으로
비난되었다.
대신에,
정신적
양심이
역사의
과정을
결정하며
그것만이
모든
다른
구조들의
근간이
된다.
미국
조지아(Georgia)대학교의Han
S. Park교수은
맑스주의로부터
근본적인
일탈이
이
시점에서
시작한다고
믿었다
(Park,
Han S.,
2002:33-34). 바로
이점에서
북한과
남한의
역사서술사이에
진정한
친선
회복이
추가될
수
있다.
4. 주체역사관과 한반도
통일
주체사상
이론가들은
민족
과거사의
사건들을
군사력의
수준과
민족의식
수준의
두
가지
주된
차원에서
평가한다.
예를
들면,
임진왜란(1592-98)의
승리의
궁극적인
원인을
한국
해군의
우월성과
통합된
민족주의의
2가지로
귀결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20세기
초
일제에
의해
민족이
식민화
된
이유를
군사력의
열등과
이조
말의
약화된
민족주의로
돌린다.
같은
이유로,
북한의
선전의
힘은
김일성의
일생에
걸친
투쟁이
자주
국방과
민족주의를
통한
인민의
이데올로기적
공고화를
위한
국가의
군사적
준비에
헌신했다고
대중들에게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Park,
Han S., 2002:18). 이
점에서
북한의
역사서술은
남한에서
종종
대중적으로
이해되는
방식에
아주
근접해졌다.
실제로,
군사적
민족주의는
그것이
외국의
헤게모니적
힘에
적대감을
야기시키고
한국의
유산과
인민들의
주권을
증진시키는
주체사상
신념체계에서
가장
두드러진
요소였다.
사실상,
북한이
주장하는
통치권의
종류는
독립
이상의
것이다.
주체사상은
한국을
선택된
땅으로
바라보며,
인민들은
끊임없이
세계
문명은
한반도에서
기원했다고
듣는다(Park,
Han S., 2002:31-32). 이
주제는
33권으로
된
“조선전사”(1979-1982)의
방대한
자료에서
처음으로
강조되었다.
모스크바
국립대학의
미카일
N.박
교수은
북한의
공식적
역사저술
중
맑스-레닌주의를
능가한
주체사상의
최종적
승리가
나타난
곳은
“조선전사”였다고
믿는다
(Mikhail N. Pak과의
인터뷰,
1999). 실제로
주체사상은
원래
한국은
다른
주권
국가와
마찬가지로
자급자족해야
한다는
학설을
전달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그러나
역사가
우연적인
발전이
결여된
특별히
계획된
것으로
조명
된다면
그
안에는
예정설이
들어있다.
인민들이
“세계의
억압된
인민들을
이끌고”
영감을
주기위해
운명지어
졌다는
개념은
북한
민족주의로
하여금
극단적인
자민족주의를
갖게
하도록
하였다(Park,
Han S., 2002:31-33).
평양에
있는
조선역사중앙박물관은
인류
문명이
한국으로부터
기인했다는
개념과
한민족
조상들은
물질적
문화적
우월성을
누렸다는
것을
전달하기
위해
고안된
문서와
유품들을
소장하고
전시하였다.
이
박물관에는
예를
들어
구석기시대의
도구들이
이전에
현대
한국인들의
조상이
거주했던
중국의
동북지역에서
발굴되었다는
비문과
함께
전시되어
있다.
전해진
바에
의하면
이
도구들은
인류에게
알려진
다른
고고학적
발견보다
더
앞선다.
이
확실성의
진위를
따지기도
전에,
이러한
물질적인
“증거”가
효과적으로
인민들의
자긍심과
민족적
우월성의
지지
기반으로
사용되었다
(Park, Han S., 2002:70).
1970년대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의
특별
발굴
팀이
몇
개의
유적지를
발견하였는데
이는
검은모루(상원군)을
포함하는데
이것은
백만년
전즈음의
것으로
추정된다.
구석기
시대의
도구와
화석화된
동물뼈
더미가
검은모루에서
발견되었다.
또
다른
유적지
승리산(덕천시)에서는
구석기
신석기시대
인간의
화석화
된
뼈와
수많은
화석화
된
동물뼈,
석화살촉,
언월도,
구슬,
고리모양의
도끼와
청동기
시대
문화의
외투
등이
발굴되었다.
검은모루
유적지보다
후시대에
속하는
것으로,
1,2번
룡곡이라
불리어지는
동굴
유적지도
발겼되었다.
몇
개의
고대의
인간
뼈가
다른
많은
동물
뼈들와
석기들과
함께
발굴
되었다.
평양의
력포구
대현동
유적지와
라선시의
굴포
유적지의
발견과
구석기
시대에
속하는
다른
유적지들은
한국이
인류
문명의
시원지
중
하나였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는”
물증을
제공하는
지극히
중요한
발견이었다.
발굴팀은
또한
온천군
은하리
긍산
유적지를
포함하여
사동구에
있는
금탄리를
포함하여
신석기
시대의
유적지를
발견하였다.
그것들은
한국의
신석기
인들이
이전
유적지의
거주민들의
후예였다는
것을
증명하는
값을
헤아릴
수
없는
발견이
되었다.
북한
고고학자들은
또한
고려와
고구려사이의
연계성을
증명하는
많은
발견을
하였다.
그들은
고려왕조의
창시
왕인
왕건의
무덤과
만월대
유적지,
공민왕의
무덤,
룡통사로부터의
증거(모두
개성지역에
있음)는
고려가
한국을
통일한
첫
국가였고
한국의
영토적
통합을
설립한
첫번째
국가
라고
믿는다(Ku
Chong-gŏn, 2002:8).
1970년대의
이론과는
달리
고조선의
수도가
아사달이라는
입장에
대한
대부분의
북한
역사학자의
최근의
의견은
만주나
중국으로부터
대동강
유역으로
옮겨진
것이
아니라
시초부터
거기에서
세워졌다는
것이다.
지난해
평양이
공식적으로
1,575번째
기념을
축하하였으나
“평양
타임즈”(The
Pyongyang Times)신문는
기원전
2333년에
세워진
신화적인
고조선이
설립된
이래로
평양이
고대
한국의
수도였다고
주장하였다.
이
신문은
“가장
첫번째
고대와
봉건
한국
국가의
수도의
2개로
지정되었다
왜냐하면
가장
유리한
지형학적
특색을
가지고
있고
사회
발전을
위한
중력의
중심에
있는
환경에
있기
때문이다”.
북한의
매체에
의하면
평양에서의
고대의
발견은
“이
지역이
인류가
진화하고
생활하였던
인류
문명의
시원지라는
것을
증명하며,
그것은
5000년
한국
역사의
모든
시기들을
목격하였다”(Cha
Ho-nam, 2002:8).
인류문명의
시원지로서의
시간적으로
찬란한
역사와
첫번째
고대
봉건
국가의
옛
수도라는
것을
자랑하는
평양은
북한의
수도로써
역사의
찬란함으로
더하며,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중심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이러한
주장을
읽고서
12세기의
명청
반란과
북한의
학자
관료들이
주장하는
것과
유사한
관점을
가지고
있다는
느낌을
피할
수
없다.
고려
통치자의
자문이었던
불교
승려
명청은
왕에게
고려에
습격하고
있는
정치
경제적
고역는
현재수도의
지리적인
위치에
기인한다고
주장하며
탄원하였다.
본래
평양
출신인
명청은
개경(개성)에서
더
길조의
위치를
자량하는
서경(평양)으로
수도를
옮길
것을
궁정에
압력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진정한
의도는
고구려
영토를
되찾기
위한
군사
운동을
준비시키기
위함이었다.
이
선택은
또한
외적들의
출현과
끊임없는
침입이
있기
대문에
중국식문화세계가
멸망할
당시,
북쪽
변방을
세우기
위함과
안전
시키이기도
하였다.
최소한
12세기
초까지는
이러한
정서가
고려에
뚜렷하였다.
만주
벌판의
낭만주의는
왕조의
이름에
함축되어
있기까지
하다.
고려는
태조
고구려를
대신한
이름이었다.
몽고
침입(1232)
이전에
양분된
민족적
의식은
고구려를
대륙적으로
신라를
반도적으로
간주하였다.
명청의
주장이
신속하게
지역명사
사이에
지지하는
것을
발견했음에도
불구하고
미래
전투의
대가를
치루어야
하는
왕은
훨씬
덜
열정적이었다.
1135년,
답답해진
명청은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는
유학파
김부식에
의해
무지막지하게
압도당했다.
김부식과
그의
동료들은
고려의
미래
발전에
대해
완전히
반대의
개념을
변론하였다.
김부식은
중국의
치국책과
국가건설을
선호하는
신라
문화유산이
지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관점은
후에
삼국사기(1145년)에
나타났고
삼국유사(1280년대)
반영되어있다.
삼국유사의
저자인
승려
일연은
사실상
장산군
경주로부터
온
“신라
씨족”의
영향을
받았다.
그때부터는
고려의
공식적
비공식적
역사는
대륙이
아닌
반도에
초점이
모아졌다.
즉,
명청과
그의
동류를
억압함으로써
평양성안에서
막혀있었던
“북진”운동이
억압되었고
만주로의
민족통의주의
주장이
무효화되었던
것이다.
낭만주의와
한국
민의
신화의
근원을
찾기
위한
연구가
항상
단군과
연결되었고,
20세기
초
많은
한국
민족주의
역사학자가
일본의
“짐무테노”(神武天皇)신화를
역습하는
일환으로
“한민족”의
확산의
꿈을
갖도록
고무시켰다.
오늘날,
몇몇
남한
역사학자들은
“한국인들”은
서북쪽에
있는
에바이칼호
지역으로부터
기원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김종록과
다른
남한
극민족주의자의
고찰과는
대조적으로,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의
의견은
바이칼호가
아닌
백두산
근처에서
단군신화가
생겨났다고
한다.
삼국유사의
역사부는
민족의
기초신화를
모두
반도방향
남쪽으로
이끌어나간다.
어떠한
문헌에서도
한반도로
가기위해
바이칼호로부터
5천
킬로미터
떨어진
한국으로
횡단했다는
선조는
찾을
수
없었다.
“역사
탐험”지의
인터뷰를
이끄는
남한의
역사학자
신용하는
기본적으로
그의
북한의
동료와
동시에
고조선의
중심은
대동강
유역에
위치한
현재
평양
근처에
위치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한족”인들은
한강
변
즉
현대의
서울
지역에서부터
왔다고
주장한다.
우리
민족의
기원에
대한
선행연구로는
이병도
선생님의
“예맥설”과
김상기
선생님의
“예
와
맥설”
두
가지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모은
자료에는
한부족을
중심으로
한
“한-예-맥
3부족설”이
진실입니다.
이
중
한족은
한강
양안,
맥족은
쑹화
(松花)
강
이남,
예족은
랴오둥
(遼東)
반도에
각각
살다
이들
중
일부가
평안도
대동강
유역의
강동현에서
고조선,
우리말로는
아사나라
부족국가를
세우게
됐습니다.
수도는
아사달이라고
불렀습니다
(신용하,
2003: 8).
최근의
이러한
낭만주의의
재출현이
한국
재통일과
연관된
두려움을
바꾸어
놓는
잠재적
방법이
될
수도
있다.
한반도
외부
어딘가에서
공통의
기원을
찾는다는
것은
북한과
남한
사이의
지역적
경쟁을
난처하게
한다.
고조선을
다문화
사회로서
해석하는
것은
1950년부터
떠오른
이질감에
대한
관용으로
호소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세종
연구소의Yurii
M. Ryurikov (류학구)
교수는
극단적
민족주의가
두
한국을
궁극적으로
합칠
수
있는
촉진제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Yurii
M. Ryurikov와의
인터뷰,
2003년).
북한의
주체역사서술은
남한에서
개발된
역사
쓰기의
민족주의적
전통에
의해
인식되고
포용되게
되면,
그
결과는
꽤
상승적일
수
있다.
영광스러운
과거사를
창조함에
있어,
남북한
학자
정치인들은
민족
화해를
위한
장을
마련할
수
있고
통합된
국가
건설의
과정에
참여할
수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는
그들의
합치된
노력의
결과가1980년에
북한이
제안된
“고려민주연방공화국”(Democratic
Confederal Republic of Koryo)이든
1989년
부터
남한정부의
공식적인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에
나오는
“남북연합”
(The Korean Commonwealth)이라
불리던
상관이
없게
된다.
후주:
Cha
Ho-nam, “Pyongyang, 1,575 years”, The Pyongyang Times (16 November
2002), p.8,
Freeman,
Derek, 1983, Margaret Mead and Samoa. The Making and Unmaking of an
Anthropological Myth, Cambridge/Mass.
김종록,
“한민족
시원의
상징
바이칼호를
찾아서:
북방의
전설
품은
시베리아의
푸른
눈”,
역사탐험
(월간중앙
6월호
별책부록)
No.1, pp.36-46.
김정일,
“고구려를
비롯한
삼국사회경제적
성격을
옳게
해명할대에
대하여”,
(1960년
10월
18일);
김정일,
“삼국통일
문제를
다시
검토 할대에
대하여”
(1960년 10월29일).
김정일,
“력사유물과
자료전시를
잘
할대에
대하여”
(1960년
11월10일).
김정일,
“우리나라에서
초음으로
발견된
구석기시대의
유적에
대하여”
(1963년
5월3일).
김정일,
“력사연구에서는
사료수집과
고증을
잘
하여야
한다”
(1964년
2월10일).
김정일,
“력사유적과
유물보존
사업에
대한 당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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